4·3 보궐선거가 말하는 것
정의당 이정미 대표가 지난 4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상무위원회 회의에 참석해 4·3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창원성산의 여영국 당선자를 언급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왼쪽 사진).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가 3일 저녁 서울 영등포구 중앙당사에서 개표방송을 지켜보고 있다(오른쪽). 황 대표는 이번 보궐선거에서 1승1패의 ‘애매한’ 성적표를 받았다.
선거는 민주주의를 위대하게 만든다. 물론 선거 때문에 포퓰리스트가 대통령이 되기도 하고, 투표 때문에 브렉시트와 같은 대혼란이 일어나기도 한다. 민심을 100% 반영하는 것도 아니다. 우발적 사건이 결과를 뒤바꿔 놓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불확실성 속에서 벌어지는 도전과 응전이 민주주의의 진정한 힘이다.
‘개표 99%에서 게임 뒤집은 정의당 여영국의 버저비터’. 경향신문의 이 헤드라인이 4·3 보궐선거의 극적 순간을 절묘하게 담아냈다. 선거도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99.98% 골인 지점에서 뒤집어진 이 결과가 어떤 파장을 몰고 올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예상대로지만 예상과 다르다”는 말에서 더불어민주당의 곤혹이 드러난다. 2016년 총선, 2017년 대선, 2018년 지선을 지배했던 ‘박근혜 청산’의 유통 기한이 (적어도 경남에서는) 끝났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반문재인’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민주당의 패배라기보다는 (여론을 악화시킨) 청와대의 패배라는 점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국정운영과 당·청 관계에서 큰 부담을 안게 되었다. 청와대와 민주당은 내년 총선을 ‘적폐 청산’과 ‘주류 교체’의 완결판으로 만들고 싶겠지만 이미 흐름은 ‘정권심판’으로 바뀌고 있는 중이다. 기회 뒤에 위기가 찾아오고, 위기 뒤에 기회가 찾아오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는 운이 좋은 편이다. 홍준표 전 대표가 ‘박근혜 청산’의 정점에서 역풍으로 악전고투했다면 황교안 대표는 ‘반문재인’의 천시를 만나 순풍을 타고 있다. 지금은 황교안의 시간이다. 차기 대권 주자 선호도 1위라는 확실한 인증도 있다. (통영·고성에) 측근의 공천과 당선을 이끌어냄으로써 당내 장악력도 한껏 높였다. 그러나 민심은 황교안 대표에 대해 여전히 유보적이다. 패배를 인정할 수도, 승자를 자처할 수도 없는 절묘한 점수를 준 것이다. 황교안의 리더십과 메시지는 ‘외연 확장’과 ‘보수 통합’에 여전히 의구심을 주고 있다.
내년 총선에서 민주·진보 진영이 국회마저 장악하여 주류 교체를 완성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보수 진영이 2016년 총선, 2017년 대선, 2018년 지선의 연속 패배를 극복하고 반격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2006년 지선, 2007년 대선, 2008년 총선에서 압승했던 한나라당이 2010년 지선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네 번을 연속으로 이기는 건 쉽지 않은 미션이다.
민주당이 제1당이 된 2016년 총선 1년 전인 2015년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민주당은 ‘이기는 정당’을 내건 문재인 대표 체제가 들어섰으나 4월 보궐선거에서 네 곳 모두 지면서 시작부터 크게 흔들렸다. 호남 중심의 ‘반문’의 거센 도전에 직면한 문재인 대표는 ‘김상곤 혁신위’로 위기를 돌파하려 했으나 9월에 안철수가 “혁신은 실패했다”며 공격에 가세하자 걷잡을 수 없는 내홍에 빠져들었다. 결국 12월13일 안철수의 탈당으로 분열은 정점에 이르렀다. 새정치민주연합이 ‘새 정치’를 상징하는 안철수와 ‘민주’를 상징하는 민주당의 ‘연합’이었으므로 다른 의원들이 당을 나가는 것은 탈당이었으나 안철수가 나가는 것은 사실상 ‘분당’이었다.
분열은 패배를 의미했기 때문에 민주당의 위기감은 공포로 바뀌고 있었다. 결국 문재인 대표 체제는 붕괴하고 ‘김종인 비대위’가 들어섰다. 문재인 대표는 ‘원칙 있는 승리’를 꿈꿨으나 패배의 두려움 때문에 ‘원칙 있는 패배’ 대신 ‘원칙 없는 승리’를 선택했다. 자칫 ‘원칙 없는 패배’가 될 수도 있는 위험한 도박이었다. 문재인의 최대 위기였다.
새누리당의 상황은 더 심각했다.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 유승민 원내대표와의 갈등은 살벌했다. 이미 청와대에서는 정윤회 문건 유출 배후로 ‘K·Y’를 지목한 터였다. 기회를 엿보던 대통령이 ‘배신’을 용서할 수 없다며 파문(?)을 선언하자 누구도 유승민을 엄호하지 않았다. 제동 장치가 고장 난 절대 권력의 질주는 코미디 같은 ‘진박’ 소동과 옥새 파동을 거치면서 파국으로 치달았다. 결국 수구 보수의 정치적 자폐에 분노한 중도 보수가 등을 돌렸다. 그 순간 한국의 보수는 주류에서 비주류로, 상수에서 변수로 전락했다.
2016년 안철수가 창당한 ‘국민의당’은 두 곳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을 타고 날아올랐다. 강풍은 호남에서 시작됐다. 호남의 40대 이하에서는 문재인과 민주당에 대한 지지가 강했으나 50대 이상에서는 강한 반문재인 정서가 있었다. 국민의당이 호남에서 23석을 석권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강한 결집 때문이었다.
안철수를 정치로 ‘불러낸’ 사람들은 20·30, 중도, 호남이었다. 20·30의 젊은 세대는 ‘기성 정치가 싫어서’ 안철수를 불러냈다. 중도는 가장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인 ‘박근혜가 싫어서’ 안철수를 불러냈다. 호남은 박근혜의 유일한 대항마인 ‘문재인이 싫어서’ 안철수를 불러냈다.
안철수가 자기는 “불려나왔다”고 했기 때문에 그를 불러낸 사람들은 약간의 부채 의식이 있었고 2016년 총선은 그 빚을 갚을 기회였다. 호남에서 강한 ‘반문재인’ 바람이 불기 시작할 무렵, 다른 지역에서는 ‘반박근혜’ 때문에 (새누리당으로부터 이탈한) 중도보수가 국민의당을 대안으로 생각하면서 또 다른 강풍의 진원이 되고 있었다.
개표 99.98%에서 게임을 뒤집은 버저비터…정의당의 승리는 절묘하다 ‘반문재인’의 천시를 만나 순풍을 타는 듯 보이는 황교안, 그러나 민심은 여전히 유보적 국민이 준 혁명적 에너지를 허무하게 소모해버린 정치, 민주당의 패배라기보다 청와대의 패배 내년 총선이 주류 교체의 완결판?…적어도 경남에선 탄핵 이전으로 회귀하고 있다
정치에 들어오기 전부터 “한나라당의 세가 확산되는 것에 반대한다”고 했던 안철수가 “새누리당의 지지율을 30% 밑으로 떨어뜨리는 것이 국민의당의 목표”라고 강조하자 새누리당에 반감을 갖고 있던 20·30 세대가 마지막으로 합류하면서 국민의당 바람은 태풍이 되었다. 견고했던 양당 정치에 (누구도 예상 못한) 거대한 균열을 내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거대 양당의 싸움에 질린 국민들이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주었으나 ‘새 정치’에 대한 비전도 없고, 리더십도 없고, 전략도 없었기 때문에 ‘개업 빨’로 끝난 식당 꼴이 되고 말았다. 기성 정치를 쓸어버릴 것으로 기대했던 ‘새 정치’ 태풍은 내륙에 상륙하는 순간 급격히 위력을 잃고 소멸되었다.
바람이 꺼지자 불이 타 올랐다. 2016년 10월에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터지자 ‘새로운 대한민국’에 대한 희망으로 수백만의 국민들이 추운 밤마다 촛불을 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고도’가 오지 않듯 ‘나라다운 나라’도 아직 오지 않았다. “이게 나라냐”는 분노가 “이건 나라냐”는 절망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아무것도 바뀐 게 없다. 바뀐 거라곤 분노의 대상뿐이다.
2016년 정점에 이르렀던 호남의 반문재인 정서는 서서히 약해지더니 지금은 50대 이상의 호남이 문 대통령의 가장 강력한 지지기반으로 반전되었다. 반면 민주당에 세 번 연속 큰 승리를 안겨주었던 ‘반박근혜’ 정서는 2018년 지방선거를 끝으로 급격히 빠른 속도로 ‘반문재인’으로 돌아서고 있다.
문 대통령과 민주당은 집권 후 두 개의 전략적 패착을 두었다. 80% 넘는 국민이 탄핵을 지지했고, 국회의원 234명이 찬성했고, 헌법재판관 만장일치로 결정했다면 문재인 정권은 당연히 ‘탄핵 연대’를 개혁 연대로 발전시켜 (헌법을 포함한) 법과 제도로 대한민국의 시스템을 완전히 개혁했어야 했다. 새로운 대한민국은 그 정도의 세력, 명분, 동력이 있어야만 가능했다. 그러나 문 대통령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두고두고 역사에 남을 통한의 실착이었다.
2년 동안 적폐 청산을 외치고 있지만 청산되기는커녕 계속 쌓여만 가고 있다. 개혁의 골든타임은 지나갔다. ‘새로운 대한민국’은 슬로건과 메시지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혁명적으로 생각하고 혁명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그런 비전, 전략, 리더십이 없었기 때문에 탄핵 이후 모든 국민이 꿈꿨던 새로운 대한민국은 한바탕의 봄 꿈으로 끝나고 말았다.
또 하나의 전략적 실수는 3당 합당 구조의 해체 이후에 ‘보수 동맹’으로부터 이탈한 중도보수를 새로운 지지층으로 편입시키지 않은 것이다.
보수가 주류에서 비주류로 전락한 결정적 이유가 굳건한 지지그룹이었던 중도보수의 이탈 때문이었다. 문 대통령이 대한민국 주류 교체를 꿈꿨다면 이들을 우군으로 끌어들였어야 했다.
한국의 유권자 지형은 대략 30% : 20% : 30% : 20%이다. 맨 앞의 30%는 2007년 정동영과 권영길을 지지했던 유권자들로 어떤 경우에도 보수 정당을 찍지 않는다. 두 번째 그룹은 대체로 민주·진보 진영을 지지하지만 상황에 따라, 후보에 따라서는 보수 정당이나 보수 후보도 찍은 적이 있는 진보의 스윙보터다. 2002년 노무현을 찍었던 유권자 중에 2007년에는 이명박을 찍은 사람이 꽤 있다.
마지막 그룹은 이른바 ‘태극기’로 상징되는 유권자들로 어떤 경우에도 진보정당을 찍지 않는다. 세 번째 그룹은 대체로 보수정당을 지지해 왔지만 상황에 따라, 후보에 따라서는 진보정당이나 진보 후보를 찍은 적이 있는 보수의 스윙보터다. 아마도 2012년 박근혜를 찍고 2014년 박원순을 찍은 사람들이 여기에 포함될 것이다.
이들 30%가 앞의 두 그룹과 연대했기 때문에 탄핵 찬성 여론이 80%가 되었다. 그리고 2018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에 역사적 승리를 안겨주었다. 안타깝게도 현재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과 이번 보궐선거 결과는 이러한 흐름이 멈추고 탄핵 이전의 구도로 회귀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주었다.
‘새로운 체제’를 꿈꾸는 국민이 만들어 준 두 번의 혁명적 에너지를 무능한 정치가 허무하게 소모해버렸다.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듯 오지 않는 ‘새로운 체제’를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까. 한국 정치는 절망이라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렸다.
2020년 총선 구도는 2012년과 2016년 어느 모델을 재현할까? 지금의 흐름이라면 2012년 모델로 회귀할 가능성이 좀 더 커 보이지만 2016년 구도 재현 가능성도 여전히 있다고 본다. 가능성을 묻는다면 70% 대 30% 정도로 답하겠다. 현재의 지도 체제로 총선을 치를 가능성을 묻는다면 모든 당이 새로운 지도부로 치를 가능성이 50% 이상이라고 답하겠다. 현재 지도부가 붕괴할 가능성을 더 높게 본다는 뜻이다. 역사적 사례를 보면 그 정도의 가능성에 베팅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총선이 다가올수록 청와대는 리스크다. 국정운영이 청와대 독주에서 당이 본격적으로 지분 요구를 하는 시간이다. 동력은 두 가지다. 여당 내 차기 권력과 대통령 지지율이다. 현재 민주당은 유력한 차기 권력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로 인한 동력은 없다. 유일한 동력은 대통령 지지율이다. 문 대통령 지지율이 40% 밑으로 떨어지면 민주당은 본격적으로 청와대를 향해 목소리를 높일 것이다. 이미 임계점에 왔다.
지금은 제3당이 돌풍을 일으키는 2016년 모델의 가능성이 낮아 보이지만 다당 체제를 향한 에너지는 언제든 폭발할 잠재력을 갖고 있다. 중도보수층이 강경보수와의 동맹으로부터 이탈하여 유동화되어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보수진영이 통합이 아니라 분화를 선택한다면 진보진영도 부담 없이(?) 분화할 가능성이 높다. 2020년에 4당 체제가 등장할 가능성도 여전히 30% 정도는 된다. 총선 레이스가 시작되었다. 변화무쌍한 한국 정치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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