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안 대표와 보수 정당
수요일(2월27일) 저녁에 뜨거운 뉴스 속보가 쏟아졌다. ‘한국당 새 대표에 황교안…입당 43일 만에 당권 장악’ 예상한 결과였지만 깜짝 이변도 있었다. ‘5·18 모독’ 논란의 김순례 후보가 3등으로 최고위원이 되었고, 원외의 정미경 후보가 2위로 당 지도부에 입성했다. 민주당 출신의 조경태 후보가 선거인단과 여론조사 모두 1위로 최고위원이 된 것도 자유한국당의 정체성 혼돈을 보여준다.
또 다른 속보가 떴다. ‘트럼프-김정은 260일 만에 다시 만났다…2차 핵 담판 돌입’ 겉으로는 핵 담판이지만 속으로는 무서운 노림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쟁을 치렀지만 지금은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동반자’가 된 베트남에서 “베트남이 좋은 모델이 될 수 있다. 북한도 베트남처럼 번영할 것”이라며 “나의 친구 김정은에게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회가 될 것”이라며 유혹했다. 그는 김정은 위원장에게 “북한은 어마어마하고 믿을 수 없는 무한한 경제적 잠재력을 갖고 있으며, 굉장한 미래를 갖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당신은 위대한 지도자다…우리가 도울 것”이라면서 ‘친미국가’로의 초대장을 보냈다.
박근혜 탄핵 부정한 채 ‘보수 대통합·외연 확장’은 단언컨대 불가능하다 3년째 선거 패배 안긴 중도보수 이탈의 일관된 메시지는 ‘박근혜 청산’ 떠나간 중도보수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총선·대선 승리는 물 건너간다 최고위원 김순례·태극기 세력 김진태 징계는 ‘황 대표’가 넘어야 할 산 1996년 신한국당·새정치국민회의·민주당·자민련의 경쟁을 보고 싶다
김정은 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생각해보면 어느 때보다도 많은 고민과 노력, 그리고 인내가 필요했던 기간이었다…불신과 오해의 적대적인 낡은 관행이 우리가 가는 길을 막으려고 했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다 깨버리고 다시 마주 걸어서 260일 만에 하노이까지 걸어왔다”며 기존 ‘핵·경제 병진 노선’ 전환의 고뇌를 토로했다. (자신들의 정치적 미래를 위해) 회담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두 사람은 기대감도 숨기지 않았다. 첫날 비공개 회담 후 김정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과 ‘흥미로운’ 얘기를 많이 했다”고 하자 트럼프 대통령도 “아마도 내 말을 들었으면 상당히 놀랐을 것”이라고 맞장구쳤다. 긴장과 불안 속에 ‘신한반도 질서’를 향한 ‘세기의 담판’ 종이 울렸다.
다음 날 ‘오찬과 합의문 서명이 취소됐다’는 속보가 떴다. ‘나쁜 합의를 하느니 합의를 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인식을 가진 대북 강경파 볼턴 보좌관의 영향력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시간은 북한 편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가진 강경파들은 제재 압박을 더 올리고 싶어 한다. 이 싸움은 긴 싸움이다. ‘비핵화와 제재 해제’가 눈에 보이는 싸움이라면 ‘한반도 신질서 구축’은 눈에 보이지 않는 진짜 싸움이다.
중국의 뒷마당 베트남에서 ‘신한반도체제’를 위한 역사적 회담이 열리기 하루 전인 26일 문재인 대통령은 “오늘 국무회의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국가적 의미를 담아 백범기념관에서 열게 됐다. 기록에 따르면 전쟁 시기를 제외하고 공공청사가 아닌 곳에서 국무회의를 여는 건 처음이다…친일을 청산하고 독립운동을 제대로 예우하는 것이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정의로운 나라로 나아가는 출발이다…100년 전 우리는 강대국의 각축 속에서 우리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식민지로 전락했지만 지금 국제사회에서 우리 위상은 완전히 달라졌다…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질서도 달라지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스스로 그 변화를 주도할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이다…우리는 더는 역사의 변방이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의 호흡이 거칠어지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전쟁’이 시작된 가운데 중국으로부터 북한을 떼어내려는 미국과 미국으로부터 한국을 떼어내려는 중국의 힘이 충돌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제 3·1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100주년을 넘어 새로운 100년이 시작된다. 새로운 100년을 다짐하고 열어갈 역량이 우리 안에 있다는 자긍심과 자신감으로 새로운 시대를 함께 열어가자”고 했지만 ‘중국 굴기’가 상수가 된 상황에서 자칫하면 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와 김상협 카이스트 초빙교수가 자주 언급하듯 대한제국 ‘구한말’과 비슷한 대한민국 ‘신한말’에 또다시 주변부 역사로 전락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준비에 실패하는 것은 실패를 준비하는 것이다.
19세기에 일본이 ‘메이지혁명’으로 서구의 근대문명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위정척사’를 내걸고 반외세의 길을 선택했다. 그 엇갈린 선택이 두 나라의 운명을 결정했다. 무기력한 나라의 운명을 기울어가는 청과 러시아에 의존했기 때문에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는 순간 씻을 수 없는 치욕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몇 년 전 도쿄 야스쿠니신사에 있는 전쟁박물관 ‘류슈칸’에서 러일전쟁 당시 제정러시아 주력함대인 발트함대가 일본 연합함대에 전멸할 때까지의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광판을 본 적이 있다. 1904년 10월에 출발해 1905년 5월까지 긴 항해 끝에 최악의 상황에서 전멸했다. 일본의 전문가는 “일본이 운이 좋았어요. 발트함대가 너무 늦게 왔어요”라고만 했지만 일본의 동맹국 영국이 발트함대의 수에즈운하 통과를 거부했기 때문에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오느라 오래 걸렸다고 알고 있었던 터라 ‘동맹’의 힘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한반도를 둘러싼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을 제대로 읽지도 못한 채 우리끼리 싸우다 나라가 망한 구한말처럼 국제정치의 변화와 기술 패권에 대한 논쟁은 고사하고 낡은 이념을 지키겠다는 ‘위정척사’가 여전히 온 나라를 뒤덮고 있다. 여기저기서 “나는 正이요, 너는 邪다” “나는 정의요, 너는 적폐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 “나는 선이고, 너는 악이다” 소리로 가득 찼다. (세상 변화에 대한) ‘통찰’도 없고 (자신을 향한) ‘성찰’도 없다. 미래는 없고 과거만 있다. 뒤를 보고 걸으면 똑바로 갈 수도, 빨리 갈 수도, 멀리 갈 수도 없다.
퇴행적 과거로 돌아가는 행렬 맨 앞에 자유한국당이 있다. (역사에서 ‘완전한 진실’은 누구도 알 수 없지만)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져 ‘5·18민주화운동’으로 교과서에 정의되어 있고, 희생자들을 모신 ‘망월동’ 묘역이 ‘국립5·18민주묘지’로 지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5·18은 폭동이 민주화로 변질된 것”(이종명), “5·18 유공자는 괴물집단”(김순례)이라는 주장은 고립을 자초하는 것이다. 김병준 비대위원장은 “일반적 역사해석에서 있을 수 있는 견해 차이를 넘어 입증된 사실에 대한 명백한 허위 주장”이라며 5·18 폄훼를 비판했다.
그는 (수차례 국가기관 조사에서 근거가 없다고 확인된)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하는 지만원씨에게 행사를 열어준 김진태, 이종명 의원에게도 “용인되어선 안될 행동”이라며 당 중앙윤리위원회에 회부했다. 그 결과 이종명 의원은 제명이 결정되었지만 김진태, 김순례 두 사람은 전당대회 이후로 징계가 유보되었다. 당당히 3등으로 지도부에 들어온 김순례 최고위원과 ‘태극기세력’의 지지가 확인된 김진태 의원의 징계는 ‘정치인 황교안’이 넘어야 할 쉽지 않은 허들이다.
황교안 대표는 (총선 압승과 2022년 정권교체를 위해) “자유 우파의 대통합을 이뤄내겠다”고 의지를 보이고 있지만 전당대회 과정에서 ‘탄핵 절차의 정당성 문제’와 ‘최순실 태블릿PC 조작 가능성’ 언급으로 ‘탄핵 불복’ 논란을 자초한 그가 풀기에는 너무 어려운 문제다. 국민 80% 이상이 동의했고, 국회의원 234명이 찬성했고, 헌법재판관 전원이 인정한 탄핵을 부정하면서 ‘보수 대통합’과 ‘외연확장’이 어떻게 가능한가. ‘미션 임파서블’이다.
상황은 명확해졌다. 보수의 분열은 불가피하다. ‘탄핵 인정’과 ‘탄핵 부정’은 같은 당에 있을 수 없다. 그 정도로 생각이 다르다면 갈라서는 게 맞다. 탄핵 찬성파의 ‘복당’은 전략적 오판이다. 나갔으면 돌아오지 말아야 했다. 지금 자유한국당의 노선으로는 등 돌린 중도보수가 돌아오지 않는다. 2016년 총선, 2017년 대선, 2018년 지선에서 민주당에 승리를 안긴 중도보수 이탈의 일관된 메시지는 ‘박근혜 청산’이다. 중도보수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총선·대선 승리는 물 건너갔다.
나는 지난 칼럼에서 황교안 대표체제 이후의 세 가지 시나리오를 예상했다. 첫째,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모두의 예상을 깨고 유승민, 안철수까지 끌어들이는 ‘보수통합’ 정당으로 일대일 승부를 하는 것이다. 이 시나리오는 전당대회를 거치면서 사실상 폐기됐다는 것이 중론이다. 둘째, 많은 사람들의 예상대로 ‘탄핵 부정’의 ‘친박당’으로 축소되어 외연확장에 실패하는 경우다. 사실상 수도권 승부가 어려운 시나리오다. 오세훈 후보가 줄곧 경고했지만 당원 23%의 동의를 얻는 데 그쳤다. 이럴 경우 유승민, 안철수를 비롯한 바른미래당 사람들과 중도·보수 인사들이 ‘중도보수신당’을 만들 수 있다. 나는 이 시나리오의 가능성을 40% 정도로 본다. 셋째, 역시 많은 사람들의 예상대로 총선 전에 황교안체제가 완전히 붕괴하는 시나리오다. 지금은 공천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황교안을 선택했지만 선거가 다가오면 당선을 보장(?)해줄 당 대표를 찾게 된다. 이 경우에도 자유한국당을 대체하는 ‘중도보수신당’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 나는 이 시나리오가 앞의 시나리오보다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이번주에 있었던 ‘자유한국당 전당대회’ ‘2차 북·미 정상회담’ ‘3·1운동 100주년’의 역사적 현장을 숨 가쁘게 지켜보면서 ‘친일’ ‘반공’ ‘독재’의 멍에를 벗어버린 새로운 ‘중도보수’ 정당의 출현을 절실하게 느꼈다. 군사독재시대를 그리워하는 ‘자폐적 광기’의 약진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한반도 평화체제에 대한 비전도 없고, 전략도 없고, 리더십도 없이 25년간 ‘북한의 붕괴’만 신앙처럼 굳게 믿고 있다가 ‘구경꾼’으로 전락한 외눈박이 보수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친일·반공·독재의 유산으로부터 자유로운 보수정당이 나와야 진보진영도 운동권판 위정척사 정치를 벗어날 수 있다. 그래야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다. 그래야 앞을 보고 걸을 수 있다. 그래야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의 변화에 대응할 수 있다. 그래야 AI시대에 선도적 국가가 될 수 있다. 새로운 100년도 ‘청산’의 역사로 기록할 수는 없지 않은가.
보수가 변해야 진보가 변하고, 진보가 변해야 보수가 변한다. 지금은 보수가 변해야 할 시간이다. 이제 탄핵은 소모적 논쟁으로 해결할 수도 없고, 묻어두는 미봉으로 가릴 수도 없다. 헤어질 시간이다. 갈라진 보수정당은 도전자 포지션에서 세 가지를 놓고 경쟁해야 한다. 첫째,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당이 대한민국을 잘못 이끌고 있다. 정권을 교체해야 한다. 이건 공통의 캠페인 목표다. 둘째, 우리가 더 나은 비전과 리더십이 있다. 셋째, 우리가 민주당을 이길 경쟁력이 있다. 이 경쟁에서 이기는 정당이 보수의 적자가 될 것이고 정권을 되찾아올 대안정당이 될 것이다.
더불어 민주당 홍익표 대변인의 ‘발언’ 논란을 보면서 친일·반공·독재로부터 자유로운 보수정당이 나와야 민주·진보 진영도 ‘더 좋은 미래’를 얘기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지난 30년을 되돌아보면 보수정당도 한반도 평화체제에 대한 ‘빅 픽처’를 갖고 ‘남북기본합의서’와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을 이끌어낸 역사가 있다. 1996년 총선을 승리로 이끈 ‘개혁보수’ 정당 신한국당을 만든 경험도 있다. ‘공동체 자유주의’로 관용과 포용의 따듯한 보수를 꿈꾸기도 했다.
2020년 총선에서 1996년에 봤던 신한국당, 새정치국민회의, 민주당, 자민련의 치열했던 경쟁을 다시 보고 싶다. 미래를 두고 치열하게 경쟁해야 좋은 인물들이 정치에 많이 들어온다. 그래야 정치가 달라진다. 보수진영의 결단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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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