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당 대 야당 한국당 당권 ‘타협은 없다’
“다시 전장에 서겠습니다.” ‘전장’이란 단어가 오늘 한국 정치의 분위기를 압축했다. “지방선거 결과에 책임지고 당을 떠나면서 ‘홍준표가 옳았다’라는 국민의 믿음이 있을 때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는데, 막말과 거친 말로 매도됐던 저의 주장들이 민생경제 파탄, 북핵 위기 등이 현실이 되면서 ‘홍준표가 옳았다’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국민과 당원들의 엄숙한 부름을 겸허히 받아들이겠다.”
홍준표가 돌아왔다고 선언한 그날, 문재인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더불어민주당의 차기 대선주자 중 한 명인 김경수 경남도지사가 드루킹 사건으로 구속됐다. 법정구속은 뜻밖이었다. 일주일 전에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구속되었다. 헌정사상 처음이었다. 그 며칠 후에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 손석희 JTBC 사장이 치명적 내상을 입었다. 또 하나의 신화적 아우라가 사라졌다. 누가 누구의 칼에 맞을지 모르는 시대다.
상대에게 퇴로를 열어주기에 본래 정치는 전쟁과 다르다 하지만 지금 한국 정치는 ‘이긴 자가 진 자를 죽이는’ 전쟁의 시대로 되돌아갔다
정치는 전쟁이 되었다. 정치는 승패를 다투는 점에서 전쟁과 본질이 같지만 상대에게 퇴로를 열어준다는 점에서 전쟁과 다르다. 퇴로를 막고 섬멸해야 할 ‘적’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스포츠와 같이 ‘공정한 룰’ ‘치열한 경쟁’ ‘깨끗한 승복’의 아름다운 승부가 모두가 꿈꾸던 한국 정치의 미래였다. 하지만 2019년 한국 정치는 ‘이긴 자가 진 자를 죽이는’ 전쟁의 시대로 되돌아갔다. 전쟁의 언어, 피의 언어가 난무하고 있다.
김경수 지사 구속에 대해 민주당은 ‘사법농단 세력의 보복성 재판’으로 규정하고, ‘사법농단 세력 및 적폐청산 대책위원회’를 구성해 대응하기로 결정했다. 위원장을 맡은 박주민 의원은 “성(창호) 부장판사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측근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며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공소장에도 (성 부장의) 사법농단 관여 사실이 적시돼 있다”고 지적한 후 “사법농단에 관련됐지만 징계나 처벌을 전혀 받지 않은 판사에 대해 탄핵을 하는 것”이 ‘사법농단 청산 대책위’의 목표라고 분명하게 밝혔다.
민주당 홍영표 원내대표는 이번 판결을 “양승태 적폐 사단의 조직적 저항”으로 규정하고 “판결이 보신과 보복의 수단이 되고 있다”며 ‘재판 불복’을 선언했다.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는 “지난 대선의 정당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문재인 정권이 태생부터 조작 정권, 위선 정권이 아니냐고 의심된다”며 사실상 ‘대선 불복’을 선언했다.
민주당 홍익표 수석대변인은 “이번 기회에 입법부 차원에서 법원 개혁을 강력히 추진할 것”이라는 강경한 입장을 밝혔다. 한국당 소속 여상규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은 “김경수 지사가 끝이 아니고 더 있다면 바로 문재인 대통령이다. 현직 대통령은 재임 중 형사소추를 하지는 못하지만 대통령에 대한 수사는 할 수 있다는 학설이 있다. 공정한 수사를 위해 대통령의 영향력이 없는 특검 수사를 촉구해야 한다”고 문재인 대통령을 직접 겨냥했다. 이쯤 되면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가 모두 참전하여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는 심리적 내전 상태다.
김경수 지사는 구속 직후 “다시금 진실을 향한 긴 싸움을 시작할 것이다.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한 과정을 이어갈 것이며 진실의 힘을 믿는다”고 했다. 손석희 사장도 온라인 팬카페에 “긴 싸움을 시작할 것 같다. 모든 사실은 밝혀지리라 믿는다”는 글을 남겼다. 그들이 예고한 ‘긴 싸움’의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한 명 정도는 살아남아야지”라는 대사가 인상적인 일본 영화 <아웃레이지>는 ‘나쁜 놈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광고 카피처럼 ‘모조리’ 죽는다. 한국 영화 <아수라> 역시 모조리 죽는 비극으로 끝난다. 긴 싸움 끝에 누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제 정치인은 더 이상 통치하는 자가 아니다. ‘죽지 않기 위해’ 칼을 휘두르는 원형극장의 검투사이거나, 피를 흘리며 바닥을 기는 격투기 선수, 혹은 ‘게임 캐릭터’ 신세가 되었다. 대중의 분노와 군중의 광기에 정치인의 삶과 죽음이 달려있다.
문제를 해결해야 할 정치는 오히려 문제 자체가 되었다. 지도자는 보이지 않고 대중의 분노를 자극하는 선동가만 넘쳐 난다. 국민이 위임한 공적 권한을 이용해 사익을 챙기는 뻔뻔한 정치인에게 부끄러움은 기대난망이다. 적폐청산을 몇 년간 듣고 있지만 청산되기는커녕 더 쌓여만 간다. 개혁은 고사하고 그나마 작동하고 있던 민주주의마저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 솔직히 말해 모든 것이 더 나빠지고 있다. 불법과 비리가 드러나도 인정도 없고, 사과도 없고, 책임도 없다. 지지자들과 함께 싸우겠다는 다짐뿐이다.
정치권 싸움에 국민 등만 터지고 있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폴 크루그먼은 <미래를 말하다>에서 경제적 양극화 때문에 정치적 대립이 격화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대립 때문에 경제적 양극화가 커진다고 통찰했다.
우리도 정치의 극단적 대립이 빠른 속도로 중산층을 붕괴시키고 있다. 교육을 위한 입시가 아니라 입시를 위한 교육으로 전락했듯, 국정을 위한 정쟁이 아니라 정쟁을 위한 국정이 돼 버렸다.
시간이 갈수록 세계화와 기술혁신의 그림자가 대중을 증오와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 (보이지 않는) 진짜 적은 외부에 있는데 모든 나라가 (눈에 보이는) ‘내부의 적’과 싸우느라 정신이 없다. 일자리는 예상보다 훨씬 큰 폭으로 훨씬 빠르게 사라지고 있고, 중산층은 붕괴하고 있다. 가난의 대물림 못지않게 (자녀들이 좋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부모의 노후까지 위협하는) ‘가난의 대올림’이 새로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불안과 분노 때문에) 모든 세대가 머리는 우파지만 몸은 좌파가 되고 있다. 미국, 프랑스, 영국을 포함한 모든 나라가 눈에 보이는 이웃에게 증오와 적의를 드러내고 있다.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당에는 힘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미국과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에 못 미치는 합의를 한다면 문재인 대통령은 국민에게 약속한 ‘완전한 비핵화’에 대해 해명하는 데 상당히 곤혹스러울 것이다. ‘김정은의 완벽한 승리’라는 보수진영의 거센 공세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야당 시절 그토록 비판해왔던 ‘예비타당성조사 면제’를 통한 대규모 사회간접자본(SOC) 사업은 자칫하면 보수·진보 양 진영으로부터 비판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손혜원, 서영교, 김경수 이슈는 예고편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쉴 새 없이 스캔들이 터져 나올 시간이다. 권력의 운명은 숙명적으로 그렇게 흘러간다. 밖에서 아무리 ‘2017체제’ ‘2018체제’를 위한 ‘개혁연대’를 외쳐도 권력에 취해 있을 때는 들리지 않는다. 새로운 체제는 오지 않았다. 지지의 환호 소리가 급격히 작아질 때는 이미 늦었다. 불행하게도 한국의 정치는 늘 그렇게 국민을 배신한다.
설 연휴가 지난 직후의 여론조사 결과 대통령 지지율이 40% 밑으로 떨어지고 민주당의 지지율이 35% 아래로 내려간다면 정권의 위기다. 대통령 지지율이 30%대로 떨어진다면 지지층 일부도 이탈한 것이기 때문에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당 지지율도 30%대 초반으로 내려가면 한국당과 오차범위 내 격차로 좁혀질 것이다.
문제는 그런 상황이 온다 하더라도 ‘플랜 B’로 전환할 마땅한 카드가 없다는 점이다. 청와대 개편은 이미 끝났고 당 지도부 교체도 총선 직전에나 동력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지리멸렬한 야당의 상황도 국면 전환의 필요성을 못 느끼게 하고 있다. 보수진영이 분열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당의 극적인 변화도 없다면 총선 승리 시나리오를 수정할 근거가 낮기 때문이다.
포퓰리스트·선동가 득세 총선이 가까이 올수록 타협의 정치는 멀어지고 더 살벌히 물어뜯을 것이다
민주평화당과 바른미래당 호남 의원들 간에 통합 논의가 오가고 있는 모양이지만 정계개편의 변수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유력한 대통령 후보가 없는 상황에서 지역을 기반으로 한 통합은 명분이 약해서 동력을 얻기 힘들다. 솔직히 말해 민주평화당은 국민의당에서 갈라져 나올 때 정치적 결사로서의 당의 미래는 사실상 끝났다.
풍전등화의 바른미래당은 자유한국당의 운명에 따라 몇 가지 시나리오가 있다. 만약 황교안과 홍준표가 전당대회에 나오지 않았다면 아마도 한국당 전당대회는 오세훈 대 김태호의 싸움이 되었을 것이다. 누가 되든 당은 분열과 갈등을 수면 아래로 가라앉히고 연착륙했을 것이다. 그렇게 됐다면 유승민은 한국당으로 돌아가고 바른미래당은 공중분해됐을 것이다.
황교안의 출마로 문제가 좀 복잡해졌다. (복당파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기 때문에) 오세훈은 힘들 것이다. 차기 대선후보 선호도 1위에 오른 황교안이 당 대표가 된다면 당분간은 황교안의 시간이 될 것이다. 황교안이 대표가 되려면 세 개의 벽을 넘어야 한다.
첫째는 박근혜다. 만에 하나라도 “황교안의 출마는 내 뜻이 아니다”라는 박근혜의 메시지가 나온다면 황교안은 순식간에 설 자리를 잃을 것이다.
둘째는 황교안 자신이다. 홍준표가 “황교안은 박근혜가 탄핵될 때 정치적으로 같이 탄핵된 사람이다…이 당이 도로 탄핵당, 도로 친박당, 도로 특권당, 도로 병역기피당으로 회귀하게 방치하는 건 한국 보수우파세력에 죄를 짓는 일”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듯이 황교안이 당 대표가 되면 총선에서 (문재인 심판론은 사라지고) ‘야당 심판론’이 작동할 가능성도 있다. 공안검사 출신의 강한 보수 이미지는 수도권 승부에서 외연확장에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황교안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어차피 자유한국당 지지자이기 때문이다. 법무부 장관, 국무총리,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의전에 익숙하고 선거 경험이 없다는 점도 치명적 약점이다.
셋째는 홍준표다. 백전노장의 인파이터인 홍준표는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당이 가장 두려워할 야당 대표다. 정권과의 투쟁 이력에서는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다. 그는 “보수우파는 물러 터졌다. 저쪽이 학을 떼도록 싸울 지도자가 있나? 없다. 그러니까 일방적으로 당한다”며 자신의 강점을 분명히 하는 한편 “대여 공격을 해야 할 처지에 (황교안의 약점 때문에) 당이 전부 나서서 수비를 하는 형태로 가면 수렁에 빠진다”며 황교안의 한계를 분명히 했다.
홍준표를 꺾고 당 대표가 되면 세 가지의 시나리오가 있다. 첫째,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모두의 예상을 깨고 유승민, 안철수까지 끌어들이는 ‘보수통합’ 정당으로 민주당과 일대일 승부를 하는 것이다. 사실상 유승민의 투항이다. 둘째, 많은 사람들의 예상대로 ‘친박당’으로 축소되어 외연확장에 실패하는 경우다. 사실상 수도권 승부가 어려운 시나리오다. 이럴 경우 유승민, 안철수를 비롯한 바른미래당 사람들과 중도·보수 인사들이 ‘중도보수신당’을 만들 수도 있다. 셋째, 일부의 예상대로 총선 전에 황교안체제가 완전히 붕괴되는 시나리오다. 이 경우에도 자유한국당을 대체하는 ‘중도보수신당’이 나올 수 있다. 사실상 유승민의 정치적 승리다. 만약 홍준표 대표 체제가 들어서면 바른미래당의 미래는 좀 더 암울할 것이다. 어느 시나리오든 전쟁은 계속될 것이다. 솔직히 나는 보복의 도돌이표가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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