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 이 강렬한 문구는 2002년 칸 영화제를 충격으로 몰아넣은 가스파 노에 감독의 <돌이킬 수 없는>의 핵심 메시지다. <라 빠르망>에 함께 출연한 인연으로 실제 부부가 된 모니카 벨루치와 뱅상 카셀이 부부로 나온 이 영화는 엔딩 크레디트 형식의 오프닝 시퀀스가 암시하듯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잔혹한 살인 장면으로 시작하여, (싱글 테이크로 촬영한) 끔찍한 강간 장면으로 이어지는 영화는 (현재의 불행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평온하고 행복했던 순간으로 데려간다.
프랑스의 작가 미셀 투르니에는 산문집 <외면일기>에서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그러나 시간은 우리가 싫어하는 모든 것, 모든 사람들, 우리를 증오하는 모든 사람들, 그리고 고통, 심지어 죽음까지도 파괴하는 장점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결국 시간은 우리들 자신을 파괴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상(喪)과 모든 고통의 원천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라고 썼다.
2009년 5월23일 민주당은 노무현을 잃었고, 2018년 7월23일 정의당은 노회찬을 잃었다. 2017년 3월31일 박근혜가 구속되었고, 2018년 3월22일 이명박이 구속되었다.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다. 영화 <박하사탕>의 주인공은 자살로 최후를 맞는 순간에 자기 생의 가장 순수했고 아름다웠던 시절을 떠올리며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울부짖는다. 누구나 돌이키고 싶은 결정의 순간이 있다. 정권을 잃고 몰락한 보수에도 그런 순간이 있다. 훗날 한국 보수 몰락의 시작으로 기록될 장면을 떠올려 보자.
‘보수 몰락’ 전조는 오세훈 서울시장의 ‘무상급식 주민투표’ 선거 패배·홍준표 체제 붕괴…친이계 끝나고 박근혜 비대위 불러
큰 책임을 물어야 할 역사적 패착 중 하나는 2011년 8월24일 실시된 ‘서울특별시 무상급식 주민투표’다. 최종 투표율이 25.7%로 개표요건 33.3%에 못 미치자 약속대로 8월26일 오세훈 서울시장이 사퇴했다. 8월21일 오세훈 시장은 무릎을 꿇고 투표율이 33.3%에 미달하면 시장직을 사퇴하겠다고 약속한 터였다. 투표 당일 저녁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는 25%를 넘으면 사실상 오세훈의 승리로 봐야 한다면서 오세훈 시장이 사퇴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루 만에 무색해질) 공언을 했다.
오세훈은 당의 의사와 상관없이 주민투표를 밀어붙였고, 당 지도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시장을 사퇴했다. 이것이 몰고 올 엄청난 ‘나비효과’를 당시에는 아무도 몰랐다. 어쩔 수 없이 끌려 들어간 한나라당과 보수진영이 총력전을 펼치는 과정에서 드러낸 ‘이념적 자폐’는 훗날 보수 몰락의 전조가 된다. 당시의 투표는 두 개의 문구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소득 하위 50%의 학생을 대상으로 2014년까지 단계적으로 무상급식 실시’와 ‘소득 구분 없이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초등학교는 2011년부터, 중학교는 2012년부터 전면적으로 무상급식 실시’ 중에 선택하는 것이었지만 (곽노현 교육감도 민주당 조례안이 너무 조급한 안이라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얼마든지 타협할 수도 있었다.
불과(?) 50세의 재선 서울시장 오세훈이 왜 이런 무모한 선택을 했는지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이 시기를 즈음해서 홍준표·김문수·오세훈·나경원 등 ‘한나라당의 전략적 자산’으로 성장한 정치인들이 ‘대한민국의 전략적 자산’이 아니라 ‘보수의 전략적 자산’의 길을 선택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무상급식의 블랙홀에 모두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는 광고 카피처럼 이때의 선택이 이들의 정치적 미래를 결정했다.
2011년 10월26일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장외 우량주인 박원순과 안철수를 야당의 전략적 자산으로 편입시켰다. 선거 패배는 홍준표 체제를 붕괴시키고 박근혜 비대위를 불러왔다. 홍준표·유승민·나경원·원희룡·남경필로 짜인 화려한 라인업은 (총선을) 뛰어보지도 못하고 무너졌다. 그 순간 친이계는 끝났다. 오세훈의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 자신과 당과 보수가 몰락하는 ‘트리거’가 되었다.
‘청산’에 몰입한 역대 정권들, 민생 골든타임 놓치는 잘못 지금처럼 민생지표 나쁠 땐 정치적 메시지 과잉 경계해야
집권당의 지나친 이념적 ‘갈라치기’는 민심을 잃고 내부의 균열을 가져올 위험이 크다. 2004년 열린우리당도 국가보안법·과거사법·사학법·언론법 등 이른바 ‘4대 개혁 입법’을 밀어붙이다 민심을 잃은 뼈아픈 경험이 있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전두환·노태우는 ‘정통성 콤플렉스’ 때문에 민생에서 업적을 남기려 노력했지만 김영삼을 비롯한 문민 대통령들은 당선 자체가 업적인 ‘정통성 신드롬’ 때문에 ‘청산’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청산은 필연적으로 이념적 당파성을 동력으로 한다.
김영삼은 문민 대통령으로서 ‘군부 청산’, 김대중은 최초로 정권교체에 성공한 대통령으로서 ‘보수 청산’, 노무현은 서민 대통령으로서 ‘기득권 청산’, 이명박은 정권을 되찾아온 대통령으로서 ‘좌파 청산’, 박근혜는 보수의 페르소나로서 ‘종북 청산’, 문재인은 촛불 대통령으로서 ‘적폐 청산’을 역사적 소명으로 생각한다. 과도한 당파적 자의식은 민생보다는 정치적 의제에 매몰되게 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 노무현 대통령은 ‘4대개혁입법’, 이명박 대통령은 ‘한·미동맹 복원’, 박근혜 대통령은 ‘통합진보당 해산’ 같은 정치적 이슈에 집중하다 민생의 골든타임을 놓쳤다. 민주당은 민생지표가 나빠지고 있을 때, 정치적 메시지의 과잉을 경계해야 한다.
사람은 자기가 잘 아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민주화운동가들이 중심인) 민주당에서 정치적 메시지가 지나치게 많은 것은 그것이 ‘더 중요해서’가 아니라 단지 ‘더 잘 알기’ 때문이다. 대중은 만족도 없고, 인내심도 없다. 한반도 평화의 시대에 동의하고, 정치개혁에 환호하지만 주머니가 채워지지 않으면 언제든 등을 돌리는 게 민심이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부진한 성적을 거둔 홍명보 감독이 패배 직후 인터뷰에서 “젊은 선수들이 좋은 경험을 했다”고 하자 방송해설을 하던 이영표가 “국가대표는 증명하는 자리지 경험하는 자리가 아니다”라며 통렬하게 비판했는데 대통령과 집권당은 민생지표가 나빠지면 위기의 경고등이 (지지율에서) 바로 켜진다.
민주 의원들, 총선 앞두고 공천 좌우할 새 지도부에 줄서기 집권 2년차 문 대통령, 내부의 적과 싸워야하는 위험한 순간
최근 문재인 대통령의 직무 긍정률이 60%대 초반까지 떨어졌다. (전임 대통령들과 비교했을 때는) 여전히 높은 수치지만 추세가 심상치 않다. 다만 50% 밑으로 급락할 가능성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정권교체에 동의하는가?’ ‘야당이 대안인가?’ 두 질문 모두에 동의한다는 의견이 50%를 넘는다면 급락할 가능성이 있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은 아니다. 그렇더라도 60% 밑으로 떨어지면 새로운 국면이 올 수 있다. 높은 지지율을 보이던 문 대통령의 지지율이 50%대로 떨어지면 당과 관료의 충성 강도가 미묘하게 달라진다.
집권 1년이 지나고 청와대가 국정운영의 자신감이 생기는 바로 지금이 위험한 순간이다. 외부의 적이 사라지고 ‘내부의 적’과 싸워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피할 수 없는 권력의 속성이다. 분열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페르시아 전쟁이 끝나는 순간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예정된 것이다.
대통령 선거 때는 모든 정치인이 대통령 후보와 특별한 관계라고 느끼게 된다. 언제든 만날 수 있고,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자신의 조언을 진지하게 듣기 때문이다. 누구나 대통령을 만든 공이 다른 사람보다 크다고 믿는다. 집권 초기에는 대부분의 정치인이 친문·친박·친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통령 후보와 대통령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자리와 일이 그렇게 만든다. 국정은 청와대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대통령과 직접 소통하는 정치인은 극소수고, 관료들이 (당을 패싱하고) 청와대와 직거래하는 것을 아는 데 1년은 충분한 시간이다. 남들은 여전히 대통령 측근으로 알고 있고, 언론도 그렇게 쓰지만 대통령과의 관계가 이전 같지 않다는 건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안다.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서운한 감정이 생기는 건 인지상정이다.
이때쯤 대통령 선거를 이끌었던 지도부가 물러가고 새로운 당 지도부를 뽑는 전당대회가 열린다. 후보들은 대통령의 성공을 뒷받침하기 위해 나왔다는 의례적 출마의 변과 함께 ‘수평적 당·청관계’를 공약한다. 당원들은 현실적으로 당·청 관계가 수평적이기 쉽지 않다는 건 알지만 (당의 불만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청와대가 쉽게 생각 못할 사람을 당대표로 뽑는다. 새로 뽑힌 당 대표는 (당의 불만을 잘 알기 때문에) 당·정·청 관계를 재정립하기 위해 청와대와 장관을 상대로 군기(?)를 잡으려고 한다. 당·청 사이에 미묘한 긴장이 흐르고 관료는 당에도 어느 정도 성의를 보여야 하는 피곤한 상황이 된다.
전당대회를 계기로 여당은 분열을 시작한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으로 바뀐다. 총선 공천을 좌우할 지도부라 당 대표에게 줄을 서는 의원들도 늘어난다. 대통령과 청와대가 배신감을 느낄 때가 이즈음이지만 ‘누가 누구를 배신했는가는 따져봐야 한다’는 의원들이 하나둘 늘어가는 것도 이때다. 청와대와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이 (총선을 앞두고 지지층의 눈치를 봐야 하는) 당에 의해 가로막히기도 한다. 집권 1년이 개혁의 골든타임이다. 그 시간을 놓치고 총선이 다가오면 개혁은 쉽지 않다. 문재인 정부도 이 구간에 들어서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집권 초부터 ‘통치연합’ 관리에 실패해 조기 레임덕에 빠졌다. 레임덕의 징후는 세 가지다. 사람이 거부당하고, 정책이 거부당하고, 기밀이 새 나간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회의장·당대표·원내대표 선거에서 연속으로 패했다. 유승민 원내대표는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며 정면으로 대통령을 겨냥했다. 2014년 11월에는 세계일보에 이른바 ‘정윤회 문건’이 보도되었다. 2015년 1월에는 “문건 파동 배후는 K, Y. 내가 꼭 밝힌다. 두고 봐라. 곧 발표가 있을 것”이라는 말을 한 것으로 알려진 청와대 행정관이 사표를 냈다. 이미 많은 의원들이 김무성 대표와 유승민 원내대표에게 줄을 선 상황이었다.
대통령의 지지율이 떨어지고 정권에 위기가 오는 것은 야당이나 언론의 공격 때문이 아니다. 외부의 적이 사라지고, ‘통치 연합’에 균열이 생기는 순간 위기가 시작된다. 김영삼 대통령은 3당합당의 주역인 JP를 내쫓고 전두환·노태우를 구속시켰을 때, 김대중 대통령은 DJP 연합의 한 축인 JP와 결별했을 때, 노무현 대통령은 호남 기반의 민주당을 깨고 열린우리당 창당에 나섰을 때,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총선 공천 과정에서 박근혜가 “국민도 속도 저도 속았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박근혜 대통령은 사실상 새누리당과 결별했을 때 정권의 위기가 시작된 것이다.
문재인 정권의 강점은 외부의 적과 싸울 때 드러나지만, 최대의 약점은 내부의 적과 싸울 때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권력 내부의 균열을 막을 권위와 리더십이 취약하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유일한 권위를 갖고 있는데 그 힘을 능수능란하게 다룰 의지와 리더십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대통령 외에는 어느 누구도 권력 내부를 조정할 힘, 권위, 의지가 없는 것이 이 정권의 아킬레스건이다. 정치적 반대자와 싸우는 것은 작은 용기만 있어도 되지만 지지자와 싸우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하다. 이번 민주당 전당대회에 출마한 대표 후보들은 자신이 (권력 내부 문제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대신할 적임이라고 나섰겠지만 문 대통령에게는 숙제일 수도 있다.
2009년 노무현 대통령의 비극적 죽음으로부터 시작된 ‘민주당의 반격’과 2011년 무상급식 주민투표로부터 시작된 ‘보수의 몰락’은 6·13 지방선거를 끝으로 일단락된 느낌이다. 민주당과 문재인 대통령 앞에는 (어느 정권도 빠져나가지 못한) ‘권력 투쟁의 늪’이 기다리고 있다. 한순간 발을 헛디디면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중요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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