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대선 역사와 2020 대선
지지층만 의식해 미국을 분열로 몰고 간 트럼프
그는 자신이 만든 ‘반트럼프’와의 싸움에서 졌다
바이든의 승리가 아닌 트럼프의 패배이고
공화당의 패배가 아닌 트럼프의 패배다
선거 캠페인을 업으로 하는 정치 컨설턴트로서 나는 오래전부터 미국 대선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1960년 케네디 대 닉슨의 선거는 TV토론이 도입된 미디어 선거라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1964년 존슨 대 골드워터의 선거는 (핵전쟁을 암시하는 충격적인 ‘데이지 걸’ 광고로 골드워터의 참패로 끝났지만) ‘골드워터’ 대 ‘골드워터’의 선거로 불리며 공화당의 정체성을 잉태한 선거로 역사에 남았다. 골드워터는 <보수주의자의 양심>(1960)과 <승리하지 못하는 이유>(1964)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초보수적인 주장으로 ‘젊은 보수’들을 열광시켰다.
진보와 반전의 시대였던 1968년은 역사적인 해였다. 2월에는 흑인 인권운동을 이끌던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암살됐다. 5월 프랑스 소르본대학에서 시작된 ‘68혁명’으로 미국에서는 베트남전 반전 시위가 크게 일었다. 6월에는 민주당의 유력 대선 후보였던 로버트 케네디가 피살됐다.
베트남전을 반대하는 68세대는 유진 매카시(‘매카시즘’의 그 유명한 조지프 매카시가 아니다)를 지지했으나 로버트 케네디 지지자들은 휴버트 험프리를 밀었다. 시카고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험프리가 후보로 지명되었으나 매카시를 지지하는 젊은이들의 항의 시위가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걷잡을 수 없는 폭력사태로 커졌다. 민주당의 분열은 닉슨의 승리를 도왔다. 지금 상영되는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은 그 당시 시위 주동자 7명의 재판을 다룬 영화다.
1972년 6월17일 워터게이트 빌딩에 입주해 있던 민주당전국위원회(DNC) 사무실에 도청 장치를 하려던 일당이 경찰에 체포됐다. 단순 절도 사건이 아니라는 의혹이 커지자 FBI가 직접 수사에 나섰다. 닉슨과 측근들은 수사를 방해하고 사건을 축소·은폐하려 했다. 사실 그 사건은 대선에는 전혀 영향이 없었다. 민주당은 조지 맥거번이 후보가 되긴 했으나 험프리와의 치열한 경선 과정에서의 분열과 부통령 후보의 중도 교체 등으로 참패했다. 선거인단 538명 중 520명을 가져가는 닉슨의 압승이었다. 수사는 계속되고 있었지만 그 사건에 관심을 둔 사람은 극소수였다.
그러나 진실을 좇는 소수가 역사의 주인공이 된다. 워싱턴포스트의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이 그런 사람들이다. 그들은 ‘Deep Throat’로 알려진 정보 제공자의 도움을 받아 역사적 특종을 쓴다. 나는 2008년 워싱턴포스트를 방문한 적이 있다. 여론조사 책임자와 미팅했던 방 벽에 워터게이트를 보도한 신문 동판이 걸려 있었다. 신문사를 안내하면서 가장 먼저 데려간 곳도 밥 우드워드 방이었다. 자부심이 느껴졌다. 영화 <더 포스트(The Post)>에서 잘 그렸듯이 뉴욕타임스에 대한 열등감을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정치인은 이슈보다는 이슈를 다루는 태도가 더 큰 문제가 된다. 닉슨 대통령이 1973년 10월19일 엘리엇 리처드슨 법무부 장관에게 아치볼드 콕스 특별검사를 해임하라고 명령한 것이 사태를 악화시켰다. 리처드슨 장관은 명령을 거부하고 사임한다. 닉슨은 권한대행을 맡은 부장관에게 또다시 명령했지만 그 역시 거부하고 사임한다. 끝내 닉슨은 콕스를 해임했다. ‘토요일 밤의 대학살’로 불린 이 사건으로 미국 국민은 닉슨에게 등을 돌린다.
궁지에 몰린 닉슨은 ‘통치행위’로 방어막을 쳤지만 연방대법원은 대통령 권한과 특권에 대한 한계를 명확히 하는 판결을 했다. “연방대법원은 헌법상 문제를 결정할 때 최종적인 목소리를 밝히는 곳입니다. 어떠한 사람도, 미국 대통령이라고 해도 헌법 위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통령은 ‘형사 재판에서 명백히 관련이 있는’ 증거를 보류하기 위한 구실로 특권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닉슨은 CIA 국장에게 FBI 수사를 방해하라고 지시하는 녹음이 든 테이프를 제출할 수밖에 없었다.
1976년 대선은 땅콩 농장주였던 ‘아웃사이더’ 지미 카터가 대통령이 된 선거였다. 단 한 차례의 조지아 주지사 경력이 전부였으니 놀라운 결과였다. 공화당 지지세가 강한 남부 출신 민주당 후보라는 것 정도가 강점이었다. 공화당 제럴드 포드는 ‘워터게이트’와 ‘닉슨에 대한 무리한 사면’이라는 모래주머니를 찬 채로 싸웠다. 베트남전 패배와 경기 침체라는 짐도 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카터가 겨우 이겼다.
워터게이트 이후 참신하고 도덕적인 인물을 찾는 분위기가 아니었다면 당선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저는 국민에게 거짓말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말 한마디로 대통령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장 훌륭한 전직 대통령’이라는 찬사 이면에는 “처음부터 전직 대통령이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조롱이 따라다닌다. 그는 거의 모든 영역에서 무능했다.
1980년 대선은 영화배우 출신으로 캘리포니아 재선 주지사를 지낸 로널드 레이건의 압승이었다. 카터는 순진한 ‘인권 외교’로 한국을 비롯한 동맹국들과 갈등을 빚고,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호메이니가 주도한 이란혁명도 막지 못했다. 이란의 미국대사관 인질 사태도 해결하지 못했다. 중동 정세의 불안으로 인한 석유 가격의 폭등과, FRB 의장 폴 볼커의 고금리 정책으로 실업과 빈곤이 치솟고, 기업과 중산층은 파산했다.
“4년 전에 비해 살림살이가 나아졌다면 지미 카터를 지지해도 좋습니다”라는 레이건의 TV토론 멘트는 그런 시대적 상황을 잘 파고들었다. 그는 트럼프가 다시 들고나온 ‘Make America Great Again(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도 사용했다. 카터 시절의 무기력한 미국을 경험한 국민들에게는 ‘강한 미국’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레이건은 공산주의 소련을 다루는 태도에서 1964년 배리 골드워터 이후 오래 기다려온 가장 ‘공화당다운’ 후보였다.
1984년 대선은 미국 대통령 역사상 가장 큰 선거인단 차이로 끝난 선거다. 525 대 13. 민주당의 월터 먼데일은 (워싱턴DC를 제외하고는) 고향인 미네소타에서만 승리했다. 그것도 0.18%포인트 차이에 불과했다. 레이거노믹스로 불리는 작은 정부·감세·규제완화·민영화 등 이른바 ‘신자유주의’ 노선에 민주당은 전통적인 뉴딜 진보주의로 맞섰다가 대참패한 것이다. 바로 거기에서 신민주당(New Democrat) 운동이 시작된다.
1984년 전통적 진보 노선으로 참패하자 남부 출신의 의원과 주지사 그룹이 중심이 되어 민주당 노선을 개혁하기 위해 민주당지도자협의회(Democratic Leadership Council)를 결성한다. DLC는 신자유주의에 대응하려면 민주당도 신자유주의를 일부 수용해 공화당에 빼앗긴 중도적인 민주당 유권자를 찾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재정안정, 자유무역, 규제완화 등 경제성장에 도움이 되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일부 수용하되 시장 실패의 보완을 위해 정부가 시장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외교안보에서도 일방적인 평화주의보다는 ‘힘에 기초한 현실적인 대외정책’을 지지하고, 범죄에 대해서도 강력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DLC의 전략은 ‘중도로의 외연 확장’이었다. 민주당의 수정 전략은 영국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와 독일 사민당의 게르하르트 슈뢰더의 ‘제3의 길’에도 영향을 끼쳤다. <제3의 길>을 쓴 영국의 앤서니 기든스는 <노동의 미래>에서 ‘제3의 길’은 DLC에서 가져온 아이디어라고 밝혔다.
빌 클린턴 아카소 주지사와 테네시주 상원의원 앨 고어도 DLC 창립 멤버다. 민주당 내부에서 세력을 키워온 DLC는 1992년 빌 클린턴을 내세워 집권에 성공한 후 1996년 또다시 승리함으로써 민주당으로서는 루스벨트 이후 처음으로 재집권에 성공했다.
1988년 대선은 보리스 옐친이 재선에 성공한 1996년 러시아 대선과 더불어 네거티브 캠페인의 교과서 같은 선거로 남았다.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부통령이었던 조지 H W 부시는 쌍둥이 적자(재정·무역), 이란-콘트라 스캔들, 블랙먼데이(주가 폭락) 등 여파로 민주당 마이클 듀카키스에게 한때 17%포인트 차로 뒤졌으나 네거티브 캠페인으로 뒤집었다.
미국 대선 역사에서 ‘탱크 광고(Tank ad)’로 알려진 유명한 정치 광고와, 매사추세츠 주지사 시절 ‘죄수 주말 석방 제도’로 휴가를 나온 살인 범죄자의 강간 사건을 공격한 ‘회전문 광고’ 끝에 붙은 “미국은 그런 위험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라는 내레이션은 강렬했다. 선거는 사실의 게임이 아니라 인식의 게임이다. 광고 내용은 사실과 달랐으나 듀카키스가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않자 무당파 성향의 유권자는 사실로 받아들였다.
1992년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전후 세대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정치는 ‘자기 성취의 희생자’라는 말을 실감한 선거였다. 조지 부시 대통령은 냉전을 종식하고 소련을 해체시켰다. 독일을 통일시켰고, 걸프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지지율이 90%를 넘었다. 바로 그 위대한 성취가 더 이상 그를 필요로 하지 않게 만들었다.
냉전이 끝나자 대중의 관심은 경제였다. 제임스 카빌이 이끈 클린턴 캠프는 승리의 키워드로 세 가지를 제시했다. ‘변화’ ‘경제’ ‘의료보험 개혁’이 그것이다. 냉전의 시대가 끝났음을 알리는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라는 선거 문구로 46세의 빌 클린턴이 공화당 12년 집권을 끝냈다.
클린턴은 1994년 중간선거에서 뉴트 깅그리치가 주도한 ‘미국과의 계약’을 들고나온 공화당에 참패했다. 공화당은 40년 만에 하원 선거에서 승리했고 깅그리치는 하원의장이 되었다. 그는 ‘르윈스키 스캔들’로 클린턴 성추문이 계속되자 탄핵을 추진했다. 클린턴은 깅그리치와는 불편한 관계였지만 공화당 밥 돌과 맞붙은 1996년 대선은 비교적 쉽게 승리했다.
1994년 중간선거 참패 이후 재선 전망이 어두웠으나 아칸소 시절부터 호흡을 맞춘 정치 컨설턴트 딕 모리스와 클린턴은 ‘중도 노선’과 ‘스몰딜(small deal)’ 전략으로 위기를 탈출했다. 이 전략은 국민 피부에 와닿는 ‘아주 작은’ 정책들을 끊임없이 제시하는 것이다. ‘가치 어젠다(value agenda)’로 불린 ‘민생’ 정책으로 승리했다. 대통령을 당파적 수장이 아니라 나라와 국민의 지도자로 보이게 한 것이다.
2000년 대선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밀레니엄답게 전후 세대가 맞붙은 최초 선거다. 1888년 클리블랜드 이후 112년 만에 득표율에서 앞선 후보가 패배한 선거였다. 537표 차이로 갈린 플로리다 재검표를 연방대법원이 막으면서 막을 내렸다. 플로리다를 조지 W 부시가 가져가면서 271 대 267로 승부가 갈렸다. 플로리다에서 녹색당 랠프 네이더는 9만7488표를 얻었다. 그 표가 미국 역사를 바꿨다.
클린턴 8년 동안 경제는 호황을 누렸지만 혜택은 골고루 가지 않았다. ‘변화’를 원한 대중에게 앨 고어는 클린턴의 계승자로서 비쳤을 뿐만 아니라 ‘엘리트’ 이미지는 더 강해 보였다. 반면 조지 W 부시는 대중 친화적으로 보였다. 어쩌면 그런 이미지가 승부를 갈랐을지도 모른다.
2004년 대선은 2001년 일어난 ‘9·11테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선거였다. 이라크전쟁 중에 치러진 선거에서 “테러와 싸울 것인가? 테러에 굴복할 것인가?”라는 프레임은 ‘총사령관’의 이미지가 있는 조지 W 부시가 절대 유리했다. 존 케리는 베트남전 참전자인 자신이 주방위군 경력의 부시에 비해 우위에 설 수 있다고 봤으나 베트남전에서의 활약상이 과장된 것으로 밝혀지며 신뢰를 잃었다. 반부시 진영에서도 뒤늦게 부시의 군 비리 의혹을 역공했으나 실패한다. <트루스(Truth)>는 CBS의 <60분>이 보도한 부시의 군복무 비리 의혹이 증거조작과 오보로 끝나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다.
2008년 대선은 미국 역사상 최초로 유색인종의 대통령이 탄생했다.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케리의 찬조연설로 전국적인 스타로 떠오른 40대의 초선 연방 상원의원인 버락 오바마는 힐러리 클린턴의 대세론을 꺾고 후보가 되었다. 본선보다 민주당 경선이 더 치열했다. 첫 번째 여성 대통령이냐, 첫 번째 흑인 대통령이냐의 상징성도 중요했다.
부시의 명분 없는 이라크전쟁 탓에 분위기는 민주당으로 기울었다. 오바마는 민주당 주류 DLC의 보수화를 비판하면서 ‘민주당다운’ (진보) 노선으로 정권을 찾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힐러리 클린턴의 이라크전쟁 찬성 이력의 아픈 곳을 파고든 것이다. 오바마는 ‘변화’의 상징, 힐러리 클린턴은 ‘기득권’의 상징이었다. 민주당은 변화를 선택했다.
9월 초 존 매케인이 공화당 후보로 선출되었을 때만 해도 승부는 예측 불가의 박빙이었다. 9월15일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하면서 사실상 승부는 끝났다. 월가발 세계 금융위기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오바마가 밋 롬니와 맞붙은 2012년 대선은 캠페인 역사에서 별다른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한국 대선과 동시에 치러져 그럴 수도 있다.
2016년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공화당 후보를 넘어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시나리오였다. 오바마 8년에 대한 백인 노동자들의 분노를 읽지 못했다. 금융위기에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월가와 중국의 부상을 바라보는 쇠락한 러스트벨트의 분노는 오바마 대통령과 힐러리 클린턴을 포함한 워싱턴의 엘리트를 향하고 있었다.
트럼프는 그들의 분노를 날것으로 대변했다. 전통적으로 민주당 텃밭이던 펜실베이니아·미시간·위스콘신은 트럼프에게 생존의 희망을 걸었다. 반면 클린턴은 그들의 절박한 목소리를 외면했다. 위스콘신은 찾지도 않았다. 트럼프의 ‘아메리카 퍼스트(America First)’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는 ‘백인 노동자 먼저’와 ‘백인 노동자를 다시 잘살게’로 들렸을 것이다.
2020년 대선은 ‘아웃사이더’ 트럼프의 퇴장으로 끝났다. ‘바이든의 승리’가 아니라 ‘트럼프의 패배’다. (상·하원 선거 결과를 보면) ‘공화당의 패배’가 아니라 ‘트럼프의 패배’다. 여러모로 이번 대선은 ‘트럼프’ 대 ‘반트럼프’의 선거였다. ‘샤이 트럼프’ 존재는 분명하게 확인되었으나 ‘안티 트럼프’ 위력은 더 막강했다. 지지층만을 의식해 미국을 분열로 몰고 간 대가였다. 그가 남긴 ‘거대한 분열’은 쉽게 치유되지 않을 것이다. 백인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에 대한 불만도 패배의 원인일 수 있다. 코로나19 부실 대응만 아니었다면 ‘중국 이슈’로 재선에 성공했을 것이다. 결과는 자초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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