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마다 반복되는 ‘죽이지 않는 전쟁’ 대선,
단순 정책 방향 결정 아닌 ‘정신건강’ 건 실존적 선택
대선이 1년 남았다. 우리는 5년마다 ‘전쟁’을 치른다. 대통령 선거는 상대를 겉으로는 ‘이길 경쟁자’로 보지만 속으로는 ‘죽일 적’으로 본다. 윤석열 검찰총장의 전격 사퇴는 전쟁을 알리는 선전포고다. 전쟁은 시작되었다. 한국에서 대통령 선거는 단순히 정책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건강을 건 실존적 선택이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기자인 장 폴 뒤부아가 쓴 <프랑스적인 삶>이라는 소설이 있다. 1950년생인 그는 이 소설에서 한 프랑스 남자의 자화상을 다섯 번이나 바뀐 정권의 변천사 속에서 밀도 있게 그려냈다. 책의 목차가 인상 깊다. 1. 샤를 드골 2. 알랭 포에르(1) 3. 조르주 퐁피두 4. 알랭 포에르(2) 5.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6. 프랑수아 미테랑(1) 7. 프랑수아 미테랑(2) 8. 자크 시라크(1) 9. 자크 시라크(2) (알랭 포에르는 짧은 권한대행을 두 번 지냈다)
이런 제목, 이런 목차의 소설이라면 한국이 제 격이다. <한국적인 삶>이라는 소설의 목차가 1. 박정희 2. 최규하 3. 전두환 4. 노태우 5. 김영삼 6. 김대중 7. 노무현 8. 이명박 9. 박근혜 10. 문재인으로 되어 있다고 상상해 보라. 이들이 우리의 정신세계에 끼친 영향을 생각하면 프랑스는 비교가 될 수 없다.
내가 태어났을 때 대통령이던 박정희는 고등학생이 된 1979년까지도 대통령이었으니 내게는 절대군주 같은 존재였다. 그의 비극적 죽음을 들었을 때의 두려웠던 기억이 또렷하다. 그의 딸 박근혜는 힘겹던 ‘바지 대통령’의 페르소나를 벗고 희극적으로 퇴장했다. 카를 마르크스가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역사는 반복된다. 처음에는 비극으로, 두 번째는 희극으로…”라고 쓴 대목이 떠오르는 장면이다.
영웅적 아우라·지도자 이미지 거의 상실한 한국 대통령… 이제 대통령의 시대는 끝, 지도자 없는 시대 살아야 한다
이제 한국의 대통령은 메시아나 영웅의 아우라는 고사하고 (대통령이라면 당연히 갖고 있어야 할) 지도자 이미지도 거의 상실했다. 대통령은 더 이상 우리를 이끌지 못한다. 이제부터는 지도자 없는 시대를 살아야 한다. ‘사자 한 마리가 이끄는 양떼가 양 한 마리가 이끄는 사자떼를 이긴다’는 식의 영웅 담론은 종말을 고했다. 대통령의 시대는 끝났다.
대한민국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후진국에서 태어난 사람과 선진국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1980년 이후에 태어나 ‘88올림픽’ 이후에 ‘초등학교’를 다닌 세대는 부모 세대와 확실히 다른 국가관과 인생관을 가졌다. 1973년 이후에 태어나 1990년대에 20대로 정치적 자유와 문화의 르네상스를 경험한 X세대도 (밀레니얼 정도는 아니어도) 이전 세대와 다른 가치관을 가진 듯하다.
반면 후진국에서 태어난 ‘국민학교’ 출신들은 아직도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에 짓눌려 있다. ‘국민교육헌장’은 이 세대가 주입받은 세계관을 잘 반영하고 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여…”
국가와 민족의 ‘집단주의’ 속에서 책임, 의무를 강요당한 그 시대에도 자유와 권리를 “타는 목마름으로” 갈구한 선각자는 있었지만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고, 우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했다. 자유주의의 결핍 속에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호사스러운 사치로 받아들여졌다. ‘한국적 민주주의’가 먹히던 시대였다.
김영삼·김대중의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0년대는 자유와 개혁의 시대였다. 억압을 뚫고 분출한 문화적 르네상스의 세례를 받은 ‘선진국 아이들’이 자라나고 있었지만 후진국 세대의 열등감은 ‘국뽕’을 벗어날 수 없었다. 2000년 역사적 남북정상회담 이후 민족주의는 고조됐지만 2002년 월드컵 이후 선진국 세대가 사회로 진입하기 시작하자 국가주의는 눈에 띄게 약해졌다.
존 F 케네디는 취임사에서 “조국이 당신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를 묻는 대신 당신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물어보라”는 비장한 말을 남겼지만 이미 세상은 달라졌다. 전쟁도 없고, 냉전도 끝났기에 사람들은 “국가가 나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기 시작했다. 세계화와 기술혁신으로 확대된 양극화와 반복되는 금융위기는 국가와 민족의 생존이 아니라 나와 가족의 생존이 먼저임을 자각시켰다.
‘나의 발전이 나라 융성의 근본임을 깨달은’ 세대가 20~40대가 되자 재벌기업 사장 출신 이명박과 박정희 딸 박근혜도 국민에게 더 이상 국가를 위해 희생해달라고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눈치챘다. 이명박의 ‘국민성공시대’와 박근혜의 ‘국민행복시대’는 그런 시대의 반영이다. 문재인의 ‘사람이 먼저다’ 역시 같은 인식의 흐름에 있다. 국가와 민족, 기업을 우선하던 세대와 ‘나와 가족의 행복’을 우선하는 세대가 실존적으로 충돌하기 시작했다.
사실 행복감은 상대적이고 주관적이며 심리적인 것이어서 객관적인 지표를 통해 ‘개인의 행복’을 측정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우주의 기원을 찾듯 행복의 조건을 찾는다.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조건은 무엇인가?’는 동서고금에 던져진 가장 중요한 실존적 질문 중 하나다.
“뭐니 뭐니 해도 머니가 최고”라는 말은 체험으로 검증된 사람의 통찰을 반영하고 있다. 돈이 건강과 함께 행복도에 크게 영향을 끼치는 것은 분명하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과 가족이 건강하고, 화목하며,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으면 행복하다고 느낀다. 사회적 지위나 명예가 더 영향을 준다고 믿는 사람들은 성취감이나 자존심이 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신앙심이나 긍정적 사고 같은 정신적 만족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들은 객관적 요소는 그다지 중요한 요소로 보지 않는다. 못사는 나라 사람들의 행복 지수가 높은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철학자 카를 포퍼는 행복은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보다는 무엇을 가지고 있지 못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행복지수는 불행에 미치는 요소를 얼마나 제거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본 것이다. 그는 <추측과 논박>에서 “추상적인 선의 실현을 위해 힘쓰기보다는 구체적인 악의 제거를 위해 힘쓰라”며 “정치적인 수단으로 행복을 이루려고 하지 말고 구체적인 불행을 없애려고 노력하라”고 했다. 모든 국가는 교육·의료·치안·복지를 통해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애쓴다.
나는 “자기가 가진 것을 사랑하면 행복하고 못 가진 것을 사랑하면 불행하다”는 말에 더 동의한다. 살아보니 행복한 날과 힘든 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365일 힘들고 365일 행복한 게 인생이란 걸 알게 됐다. 나에게 생긴 일은 남에게도 생기고 남에게 생긴 일은 나에게도 생기는 것이 삶의 이치다.
나는 ‘자유’와 ‘자율’이 행복의 가장 큰 요소라고 생각한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자기 삶을 다른 사람이 결정하는 것’, 즉 ‘구속’과 ‘타율’이 불행의 근원이다. 구속된 사람은 자기 방문을 잠글 자유를 빼앗긴 사람이다. 행복과 불행은 자유와 구속에서 갈린다. 인류의 자유를 위한 투쟁의 역사는 사실은 행복을 위한 투쟁의 역사였다.
누구나 낯선 환경, 불확실한 상황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입소 첫날의 군대 훈련소와 검진 결과를 기다리는 병원 대기실에서 웃음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선착순 돌기가 힘든 것도 언제 끝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만일 열 바퀴를 돌면 끝난다는 사실을 알고 뛴다면 세 바퀴를 돌더라도 언제 끝날지 모르고 뛰는 것보다 힘이 덜 든다. 영화가 시작된 지 10분 만에 주인공이 죽을 리는 없으므로 주인공이 위기에 처해도 영화는 편하게 볼 수 있다. 불확실성과 예측 가능성은 ‘삶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가르는 선이다.
내 직업적 정체성은 정치 컨설턴트·정치 분석가·정치 칼럼리스트다. 세 가지 일 중 가장 행복할 때는 칼럼을 쓸 때다. 100% 내가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 분석가로 방송에 나가면 주제도 방송사가 정하고, 사회자의 질문에만 답해야 하고, 생각이 다른 패널도 있기 때문에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 컨설팅은 그보다도 훨씬 어렵다. 전략은 수립·설득·실행·유지의 네 단계를 거치는데 갈수록 상황에 대한 통제력을 잃을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행복지수는 그 사회가 얼마나 예측 가능한가에 따라 결정된다. 측정하는 기준에 따라 잘사는 나라가 앞 순위에 나오든, 못사는 나라가 앞 순위에 나오든 이 나라들의 공통점은 미래가 예측된다는 것이다. 두 사회 모두 ‘깜짝 놀랄’ 일이 별로 없다. 이 나라들은 환한 대낮의 고속도로 같다. 수 킬로미터 앞이 내다보이고 주변의 풍경도 볼 수 있는 여유 있는 사회다. 상황을 충분히 예견할 수 있으므로 자율적인 계획이 가능하다.
한국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일이 일상으로 일어난다. 캄캄함 밤에 구불구불 굽은 낭떠러지 산길 같은 사회다. 몇 미터 앞도 안 보인다.
정치에 관한 훌륭한 정의 중 하나는 ‘Agenda(어젠다)를 Non-Agenda(논-어젠다)로 바꾸는 기술’이라는 것이다. 이슈가 될 것을 대화와 타협을 통해 이슈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정치다. 좋은 정치는 대중이 그 존재를 느끼지 못하도록 새벽에 쓰레기를 몰래 치우는 청소차와 같은 것이다. 불행하게도 한국의 정치는 여름 대낮에 아파트 단지에서 수박 파는 트럭처럼 시끄럽다. 정치가 갈등의 끝이 아니라 갈등의 시작이다.
정치는 도덕군자가 하는 것이 아니다. 이기적이고 탐욕스럽고 저급한 사람이라도 시스템에 의해 통제될 수 있어야 한다. 사회가 개인의 감정이나 판단 혹은 도덕이 아니라 시스템에 의해 움직여야 미래를 안정적으로 예측할 수 있다. 시스템은 ‘대기 번호표’ 같은 것이다. 누구에게도 특권을 주지 않고 ‘공정’하게 기회를 주는 것이다. 대기 번호표는 공정하기도 하지만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를 예측할 수 있게 해준다. 정치가 해야 할 일이 바로 이것이다. ‘불확실성’을 제거해 가시거리가 긴 대낮의 고속도로와 같은 ‘예측 가능성’을 높여주는 것이다.
촛불정부에 기대한 건 법·제도 개선을 통한 새 대한민국,
현실은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극단적 진영 싸움
이재명의 독주와 윤석열의 ‘출사’로 진영은 해체…
‘중도 유동성’ 커질 2022년 대선은 양 진영 모두 분열된 1987년 대선과 유사할 듯
우리가 ‘촛불정부’를 자임하는 문재인 정권에 기대한 것도 이것이었다. ‘1987년 체제’ 이후 30년 만에 개헌을 포함한 법과 제도의 시스템 개선을 통해 새로운 대한민국으로 가는 ‘2017년 체제’를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명분도, 세력도, 동력도 충분했다. 그런데 ‘2017년 체제’는 오지 않았다. ‘2018년 체제’도 오지 않았다. ‘2020년 체제’도 오지 않았다. 새로운 체제는커녕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극단적 진영 싸움만 있었다.
‘조국 내전’과 ‘코로나19’ 이후 한국 사회는, 신뢰는 무너졌고 대화는 단절됐다. ‘생각이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지혜’인 민주주의는 훼손되었다. 법치주의는 회복하기 어려운 깊은 내상을 입었다. 그 틈을 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악성 바이러스인 극단적 진영 논리, 권력의 사유화, 공공성의 실종, 포퓰리즘, 반지성주의, 폭력적 팬덤, 음모론과 가짜뉴스 팬데믹은 사회 곳곳을 감염시켰다. ‘적폐 변이 바이러스’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문재인 정부 4년간 한국 사회는 공정성과 예측 가능성이 크게 떨어졌다. 사법을 포함한 모든 공적 영역에 대한 신뢰가 훼손됐다. 정치는 실패했고 법치는 무너졌다. 사회 전반에 불신·불만·불안이 확산되면서 사람들의 행복감은 크게 낮아졌다. 미래에 대한 통찰과 현재의 문제 해결 능력이 없는 시대착오적 국가주의 세력과 낡은 민족주의 세력은 100년 전 과거로 싸우고 있다. 일류는 일류를 쓰고, 이류는 이류를 쓰는데, 삼류는 사류를 쓴다. 대한민국은 그런 나라가 됐다.
2022년 대선은 극단적 진영 싸움에 지친 ‘스윙보터’ 중도의 분노가 양극단을 심판하는 선거가 될 가능성이 높다. 박영선·박형준의 압승, 오세훈의 승리, 안철수의 안정적 우위 유지의 공통점은 중도지향성이다. 한국 대선은 진영이 결집하면 양자구도가 되고, 진영이 분열하면 다자구도가 되었다. 2002년, 2012년 대선은 양 진영이 결집한 양자구도였고 다른 대선은 모두 다자구도였다. 중도의 유동성이 어느 대선보다 커질 것으로 보이는 내년 대선은 진영이 최대로 결집한 2012년 대선보다는 양 진영이 모두 분열된 1987년 대선과 유사할 것이다.
35년 만에 ‘4자 필승론’이 재등장할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당시 노태우는 양김의 분열로 승리를 확신했고, 김대중은 TK(노태우)와 PK(김영삼)의 분열로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김영삼은 노태우와 김종필의 보수 분열로 승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번 대선도 양 진영이 모두 해체되면서 ‘4자 필승론’의 유혹에 빠져들 것이다. 이재명의 독주와 윤석열의 사실상 출사로 양 진영이 해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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