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 않은 ‘2018년 체제’
2016년 10월 말에 시작되어 2017년 3월까지 계속된 촛불집회는 2016년 12월9일 국회의 탄핵안 가결과 2017년 3월10일 헌법재판소의 탄핵소추안 인용을 이끌어냈다. ‘헌법 제정 권력’의 요구에 ‘헌법 개정 권력’과 ‘헌법 해석 권력’이 부응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파면’되었다. 1987년에 ‘대통령을 내 손으로’ 뽑을 권리를 쟁취한 국민은 ‘대통령을 내 힘으로’ 쫓아낼 권리도 있음을 증명했다. 2017년 촛불혁명은 대한민국 헌법 1조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서구가 시민혁명을 통해 왕이 법인 ‘왕정’의 시대를 끝내고 법이 왕인 ‘공화정’의 시대를 열었듯 한국의 민주주의도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이게 나라냐”는 광장의 분노에 문재인 대통령은 ‘나라다운 나라’를 약속했다. 문 대통령은 ‘새로운 대한민국’으로 우리를 이끌 수 있을까? 집권 후 (성역이었던 사법부를 포함한) 거의 모든 영역에서 적폐청산과 주류 교체로 요란하지만 법과 제도로 패러다임을 바꾸지 못하면 불가역적 시스템인 ‘체제’라 이름 붙이지 못한다. 새로운 체제를 만들지 못하면 새로운 대한민국도 없다. 1987년에는 비록 쿠데타의 주역인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었지만 개헌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되었기 때문에 (쿠데타 시대로 되돌아갈 수 없는) 불가역적인 ‘1987년 체제’가 들어설 수 있었다. 금융실명제도 불가역적이다. 촛불보다는 투표가 힘이 세고, 투표보다는 제도가 힘이 세다.
유감스럽게도 (새로운 대한민국을 위해 그토록 갈망했던) ‘2017년 체제’ 혹은 ‘2018년 체제’는 오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는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오지 않는 고도를 한없이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처럼 ‘오지 않을’ 새로운 체제를 기다리는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년이 전하는 “고도씨가 오늘 밤엔 못 오고 내일은 꼭 오겠다고 전하랬어요”라는 말만 믿고 두 사람은 마냥 기다린다. 아무리 기다려도 고도는 오지 않고 밤이 되면 소년이 나타나서 똑같은 말만 반복한다.
9월 당정청 전원회의서 외친
“강력하고 지속적인 적폐청산”
진보 장기집권 통한 제도화 꿈
9월1일 청와대 당·정·청 전원회의에서 문 대통령이 “강력하고 지속적인 적폐청산으로 불의의 시대를 밀어내고 공정하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하자 자유한국당은 “임기 내내 적폐청산만 할 것인가”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10월17일 더불어민주당 윤호중 사무총장은 ‘한겨레티브이’ 인터뷰에서 “10년으로는 변화가 제도화되고 뿌리내리는 데 부족한 기간이다. 좀 더 긴 시간 진보정권이 유지되면서 우리 사회 발전을 가로막는 적폐도 고치고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 정착시킬 때 선진국에 걸맞은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이라며 이해찬 대표의 ‘20년 집권’ 의지를 뒷받침했다. 적폐청산은 문재인 정부 임기 내에 그칠 것이 아니라 10년, 20년 지속할 과제라는 컨센서스가 민주당에는 있다.
민주당은 국회에서 압도적 의석을 갖지 못하는 한 적폐청산이 불가능하므로 2020년 총선에서도 압도적으로 지지해줄 것으로 믿는 모양이다. 정치인은 “내일은 꼭 오신답니다”라며 희망고문을 하는 고도의 전령 같은 존재다. 그러나 고도가 끝내 오지 않듯 새로운 세상도 쉽게 오지 않는다. 민주당은 총선에서 압승한다면 적폐를 일거에 청산하고, 새로운 대한민국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또(!) 호언할 것이다. 과연 그럴까. 정말 민주당이 총선에서도 압승할까? 만약 진보진영이 180석 넘는 의석을 확보한다면 ‘2020년 체제’가 가능할까?
보수진영이 지리멸렬한 상황이지만 다음 총선은 (보수진영에 대한 마지막 심판이 되기보다는) 문 대통령과 민주당에 대한 ‘심판’의 선거가 될 가능성이 더 크다. 국민은 2016년 총선, 2017년 대선, 2018년 지방선거에서 연속으로 민주당에 역사적 큰 승리를 안겨주었다. 유권자가 정당이나 정치인을 지지하는 이유는 세 가지 중 하나다. 좋아해서, 필요해서, 혹은 상대가 싫어서 찍는 것이다. 가장 강력한 동력은 ‘상대가 싫어서’다. 사람들은 무엇을 사랑하는가보다 무엇을 증오하느냐에 따라 투표하기 때문이다. 대중은 (상대가 싫어서) 반대하러 투표장에 가는 것이다.
지난 세 번의 선거 결과는 전통적으로 보수 정당을 찍어온 30% 정도의 중도보수층이 박근혜 정권에 대한 실망과 분노로 ‘보수 동맹’으로부터 이탈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민주당을 좋아해서 찍은 것도 아니고 필요해서 찍은 것도 아니다. 단지 박근혜 대통령과 친박이 더 싫었을 뿐이다. 탄핵 찬성 여론이 80%였다는 사실은 중도보수층이 민주진보진영과 ‘같은’ 정치적 선택을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여론 때문에 국회의원 234명이 탄핵에 찬성할 수 있었다.
새누리당에서도 꽤 많은 의원이 찬성했다. 이들은 탄핵 반대 진영으로부터 ‘배신자’로 찍혔다. 정치적 명운을 건 결단이었지만 탄핵 찬성 진영으로부터도 그에 걸맞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이들은 양쪽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탄핵 찬성파로부터는 적폐로 몰리고, 탄핵 반대파로부터는 반성문 제출을 요구받고 있다. 일부는 굴욕을 감수하고 자유한국당으로 돌아갔고, 일부는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적폐청산의 골든타임 놓치고
‘2018년 체제’ 만들지 못한 건
탄핵 찬성했던 보수 의원들을
‘개혁 연대’로 품지 못한 탓
왜 문 대통령과 민주당은 탄핵 연대를 새로운 대한민국을 위한 ‘개혁 연대’로 끌어안지 않았을까? 왜 촛불혁명과 탄핵 주역을 민주진영으로 축소시켰을까? 문 대통령이 촛불 민심이 요구한 적폐청산의 골든타임을 제대로 인식했다면 국민들에게 약속한 ‘나라다운 나라’, ‘새로운 대한민국’을 위해 탄핵 연대를 유지할 수 있는 구상과 전략이 있어야 했다. ‘네이션 리빌딩’ 정도의 담대한 개혁을 하려면 세력, 명분, 동력, 전략이 모두 중요한데 명분과 동력이 충분했음에도 불구하고 세력에 대한 전략적 고려가 부족하여 골든타임을 놓쳤다. 문 대통령도 결국 ‘비토크라시’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대한민국은 2000년대 이후 대통령의 힘은 빠지고 국회와 사법부의 힘은 커진 ‘과두’적 상황에서 (누구도 결정할 힘은 갖지 못하고) 상대 정파의 정책과 주장을 모조리 거부하는 ‘비토크라시’의 늪에 빠져 있다.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실패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탄핵 연대는 그런 구조를 단숨에 뛰어 넘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무의미하게 시간을 날려버리고 말았다. 결국 개헌을 비롯한 모든 개혁 과제를 ‘처외삼촌 묘 벌초하듯’ 툭 던지고는 적폐세력 저항 탓으로 돌린다. 비전도 없고, 전략도 없고, 리더십도 없다.
정치가와 군인은 이기기 위해
생각이 다른 쪽과도 연합해야
분노 만드는 ‘정체성 강조’보다
무엇이 같은지를 얘기할 때다
문 대통령이 적폐청산을 위한 연합 정치를 했다면 이해찬 대표의 구상대로 20년 집권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보수진영은 1990년 3당 합당으로 25년간 한국 정치의 주류 지위를 유지해왔다. 2017년 탄핵과 대선 과정에서 3당 합당 구조는 완전히 해체됐다. 이때 떨어져 나온 중도보수(합리적 보수나 리버럴 등 뭐라 부르든)를 민주당의 새로운 지지기반으로 확장할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는데 허공으로 날려버린 느낌이다.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찍었다는 자괴감으로 보수 동맹으로부터 이탈한 중도보수는 자신들의 ‘진보적’ 선택이 환영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민주 동맹’에 편입되기를 주저하고 있다. 이들을 동맹으로 끌어들이지 못한다면 20년 집권은 고사하고 2020년 총선 승리도 불확실하다.
선거 연합을 넘은 통치연합은
정통성 콤플렉스의 노태우뿐
정통성 자신감 가진 YS 등은
상대를 청산 대상 간주해 위기
정치에서는 지지기반을 넓히면 살고 좁히면 죽는다. 지난 30년간 연합한 세력은 승리했고 분열한 세력은 패배했다. 예외가 없다. 물론 정당이나 정치인은 자기를 규정하는 ‘정체성’이 있다. 그러나 선거에 이기기 위해서는 정체성을 뛰어넘어 (외연확대를 위해) 생각이 다른 사람과 ‘선거 연합’도 해야 한다. 김영삼(3당 합당), 김대중(DJP 연합), 노무현(정몽준과 후보단일화) 모두 그렇게 대통령이 되었다. 모든 대통령은 정책의 실패나 야당의 공격보다는 선거 연합을 깨고 자기의 정체성에 집착할 때 위기가 찾아왔다.
선거 연합을 넘어 국정운영을 위해 ‘통치연합’의 범위를 넓힌 대통령은 놀랍게도 노태우뿐이다. 군사쿠데타의 주역이자, 36.6%의 낮은 지지율로 당선되어 정통성 콤플렉스에 시달린 노태우는 여소야대를 일거에 해소하기 위해 3당 합당을 결행했다. 반면 (정통성에 자신감을 가진) 김영삼을 비롯한 이후의 모든 대통령들은 상대를 ‘청산’의 대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예외 없이 ‘선거연합’보다 지지기반을 좁히는 선택을 함으로써 위기를 자초했다.
2000년대 이후 정치를 비롯한 다양한 영역에서 자주 듣는 단어가 ‘정체성’이다.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의 김상곤 혁신위는 ‘당 정체성 확립’을 거듭 강조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누구를 위하여 어디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것이 정체성의 핵심이다.(…)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혁신의 핵심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새 정치’를 상징하는 안철수와 ‘민주’를 상징하는 민주당이 반새누리당 ‘연합’을 한 것인데 새삼스럽게 정체성을 묻는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마치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과 일본에 맞서 손을 잡은 미국과 소련의 ‘연합군’에게 정체성을 묻는 것과 다름없다.
자유한국당의 전원책 조강특위 위원도 비대위원장으로 거론되던 7월 인터뷰에서 “당명을 새누리로 바꾸고 보수를 공개적으로 지운다고 했고, 당의 ‘정체성’을 바꿔버린 것이다. 보수주의 궤멸이 그때 시작됐다.(…) 당의 정체성이 똑바로 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민의당과 바른정당도 합당 당시 정강정책에 ‘진보’와 ‘햇볕정책’을 둘러싸고 진통을 겪었다.
자유한국당의 김병준 비대위원장은 최근 인터뷰에서 “지금은 ‘무엇이 다른가’를 얘기할 때가 아니라 ‘무엇이 같은가’를 얘기할 때다”라고 했는데 핵심을 짚었다. 정치가, 군인, 기업가는 결과를 만들기 위해 ‘하나만 같아도 동지’로 보는 유연함이 있어야 한다. ‘하나만 달라도 적’으로 보는 사람은 정치에 맞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학자, 종교인, 법조인, 언론인, 시민운동을 하는 것이 낫다. 정치가와 군인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공산주의 소련과 ‘연합’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삼성이 스마트폰 시장에서 강자가 된 것도 구글의 안드로이드 ‘동맹’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생각이 다른 사람과 연합을 했기 때문이다. 정치는 합리적인 사람보다는 합목적적인 사람이 해야 한다. 정치적 반대자들과 싸우는 건 작은 용기만 있어도 되지만 지지자들에게 욕먹는 결단은 큰 용기가 없으면 할 수 없다. 정치가 어려운 이유다. 이회창이 하나만 달라도 적으로 보는 대쪽 같은 원칙 대신 ‘하나만 같아도 동지’로 보는 양김 정치의 절반만 배웠어도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다.
<역사의 종언>의 저자로 유명한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아이덴티티(IDENTITY) : 정체성, 존엄의 욕구와 분노의 정치>라는 책에서 최근 20년 동안 지구촌 유권자들을 자극한 것은 불평등 심화에 따른 ‘분노의 정치’였다고 해석했다. 대다수 정치인이 집단의 품위와 존엄이 굴욕을 당하고 폄하되는 상황으로 가고 있다고 ‘그들의’ 유권자에게 호소했다. <역사의 종언>에서 헤겔이 말한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으려는 욕구’를 굉장히 중요하게 받아들인 후쿠야마는 이 책에서는 ‘집단의 존엄’이 ‘정체성’으로 발전했다고 주장했다.
‘정체성’은 결국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의 외부적인 표출이다. 후쿠야마는 아이덴티티의 표출은 분노를 만들고, 정치를 포퓰리즘으로 흐르게 한다고 경고했다. 그의 말대로 오늘날 정치는 국가, 민족, 인종, 종족, 종교, 성, 신분, 세대, 역사, 계급, 계층, 이념, 지역을 망라한 ‘정체성 정치’로 증오와 분노의 전쟁터가 되었다. 자크 아탈리는 <미래의 물결>에서 아프리카가 유럽을 닮게 되는 것이 아니라 유럽이 아프리카를 닮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는데 그의 예언대로 세계는 지금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시대가 되었다.
한국 정치도 모두가 정체성에 깊은 상처를 입은 채 분노와 증오의 대결로 치닫고 있다. 정치의 위기, 대한민국의 위기다. 지금은 정체성을 드러내며 무엇이 다른가를 얘기할 때가 아니라 무엇이 같은가를 얘기할 때다. 연합의 정치, 통합의 리더십이 절실한 때다.
원문보기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11030600005&code=910100&sat_menu=A0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