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나 할 수 없는 정치
선거 당선 이유로 중요한 자리 꿰차고 앉아 있는 정치인들,
‘나라 이끈다’는 주체적 자각도 못하고 그렇다고 물러나지도 않아
학자·기자·법조인·종교인·작가·시민운동가들 권력과 부 좇을 뿐
사회 향한 ‘통찰’도 없고 자신 향한 ‘성찰’도 없고 ‘현찰’만 챙겨
정치는 내 삶과 단 1㎝도 떨어지지 않아,
사회에 대한 철학·고도의 전문성 없는 아마추어들에게 맡겨선 안돼
정치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해서는 안된다. 사소한 일에도 전문가의 의견을 신봉하는 사람들도 정치는 아무나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정치는 아무나 하고 있다. 나는 오래전 이 주제로 한 일간지에 ‘정치를 아무나 해도 된다고?’라는 칼럼을 기고했다.
“당신이 지리산 청학동에 산다고 해도 정치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독도나 마라도에 있는 사람에게도 정치는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정해준다. 신체를 구속할 수도 있으며, 돈도 걷어가며, 군대로 데려가기도 한다. 그것도 모자라 당신의 머릿속도 들여다보고 싶어 한다. … 정치는 당신의 행동만이 아니라 ‘정신세계’도 지배한다. 정권의 성격(솔직히 말하면 대통령의 성격)은 개인의 성격에 아주 크게 영향을 미친다. 프랑스의 작가인 장 폴 뒤부아는 <프랑스적인 삶>에서 한 프랑스 남자의 자화상을 다섯 번이나 바뀐 정권의 변천사 속에서 밀도 있게 그려냈다. 9부로 된 목차 자체가 프랑스의 대통령 이름으로 되어 있다. … 예컨대 <한국적인 삶>이라는 소설의 목차가 1. 박정희 2. 최규하 3. 전두환 4. 노태우 5. 김영삼 6. 김대중 7. 노무현 8. 이명박 9. 박근혜로 되어 있다고 생각해 보라. 이들이 한국인의 삶에 끼친 정신적 충격을 감안할 때 얼마나 극적인 소설이 탄생할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당신이 정치에 아무리 냉소적이어도 정치는 당신으로부터 단 1㎝도 떨어지지 않는다. 원하지 않더라도 정치는 당신의 삶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현실적 지배력이다. 그 때문에 정치는 사회에 대한 철학, 의지, 전문성이 없으면 해서는 안된다. 정치는 고도로 훈련된 전문가의 영역이다. 우리 정치의 끔찍한 불행은 정치가 갖는 영향력이 막강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엄청난 힘을 아마추어들이 다룬다는 사실이다. 선거에 나가 당선되었다고 저절로 전문가가 되는 것이 아니다. … 그런데 왜 정치는 아무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외교를 잘 모르는 사람들도 외교는 전문가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외무고시를 합격한 외교관에게 그 일을 맡긴다. 재판은 매우 전문적 영역이기 때문에 사법고시를 합격한 사람에게 맡기는데 그것도 일정한 연수를 거쳐야만 한다. 군인이나 경찰, 의사를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학교는 있는데 왜 정치는 전문적으로 교육하지 않는 것일까? 정치가 외교보다 쉽다고? 천만의 말씀. 세상에 제일 어려운 게 정치다.”
정치는 너무나 위험하고 중요한 일을 다루기 때문에 아무나 해서는 안된다. 프랑스의 전시내각 총리를 지낸 조르주 클레망소는 “전쟁은 너무나 중요한 것이어서 군인들에게만 맡겨 놓을 수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지만, 군 출신인 샤를 드골은 “정치는 너무나 중요한 것이어서 정치인들에게만 맡겨 놓을 수 없다”고 재치 있게 뒤집으며 정계에 복귀했다.
아무나 정치를 해도 된다고 믿는 사람들은 기성정치를 혐오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인물을 ‘쇼핑’한다. 그런 정치 소비자의 눈에 안철수는 매력적인 ‘신상(품)’이었다. 안철수의 상징 자본은 ‘정치권 밖의 명망가’라는 데 있었다. 박원순도 마찬가지였다. “정치하려거든 정치하지 마라”라는 격언(?)을 증명하는 인물들이다. 정치 경험이 전혀 없는 명망가가 나라를 구해줄 것이라고 믿는 ‘메시아주의’는 아주 위험한 반(反)정치 포퓰리즘이다.
대니얼 부어스틴이 <이미지와 환상>에서 통찰한 대로 옛날에는 위대하면 유명해졌지만 지금은 유명하면 위대해진다고 믿는 시대다. 예능의 시대, 가벼움의 시대다. 영화 <지골로 인 뉴욕>에서 우디 앨런은 (장사가 안되는 서점을 폐업하면서) “요즘은 이런 귀한 책을 찾는 놈들이 더 귀해”라며 한탄했지만 오늘날 정치인은 차고 넘치지만 정치가는 너무나 귀하다.
1992년 미국의 롭 넬슨과 존 코완이 X세대의 정치참여를 외치며 시작한 청년정치운동단체 ‘Lead or Leave’는 오늘 한국 정치에 꼭 필요한 운동이자 슬로건이다. 대한민국 위기의 핵심은 자리에 걸맞은 능력과 책임감이 모자란 사람들이 너무나 중요한 자리를 뻔뻔하게 꿰차고 있는 것이다. 이끌지도 못하면서 떠나지도 않는다. 사자 한 마리가 이끄는 양 떼가 양 한 마리가 이끄는 사자 떼를 이긴다는 속담이 있지만 우리는 양 한 마리가 양 떼를 이끄는 꼴이니 말할 것도 없다.
박지성은 평범한 팀으로 전락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대해 “이기고자 하는 정신력을 항상 지녀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역사다. 선수들도 가져야 한다. 전체 클럽이 같은 마음을 가지고 같은 것을 향해 가야 한다”며 잃어버린 ‘위닝 멘탈리티’를 되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금 대한민국은 관선 이사가 파견 나와 있는 주인 없는 대학 꼴이다. 우리가 대한민국을 이끌고 있다는 ‘주류 의식’을 자각하고 있는 주체가 없다. 비전도, 전략도, 리더십도 없이 ‘처삼촌 묘 벌초하듯’ 시늉만 내는 ‘비주류 의식’에 모두가 사로잡혀 있다. 대한민국은 꿈도 잃고, 힘도 잃고, 길도 잃었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 정치의 가장 큰 문제를 ‘제왕적 대통령’과 ‘청와대 정부’라고 말하지만 나는 모두 동의하지는 않는다. 제왕적 대통령이나 청와대 정부라는 표현은 마치 ‘무소불위’의 권력이 아직도 있는 듯 들리지만, 사실 대통령의 권력은 1970년대 긴급조치 시대를 정점으로 매일매일 시나브로 약화되어 왔다. 어쩌면 이제 대통령의 힘은 권력기관을 포함한 고위 관료에 대한 인사권 정도만 남았을지 모른다. 국회를 지배할 수도, 사법부에 영향을 미칠 수도, 권력기관을 통제할 수도, 언론을 장악할 수도 없다. 청와대 정부라는 비판은 동의할 수 있지만 적어도 ‘제왕적’ 대통령이란 비판에는 동의할 수 없다.
오히려 대통령의 권력이 약화되고 국회와 사법부의 힘은 커진 ‘과두’의 상황에서 누구도 결정할 힘은 갖지 못한 채, 상대 정당에 무조건 반대할 정도의 힘만 갖고 있는 ‘비토크라시(Vetocracy)’ 늪이 한국 정치의 핵심적 문제다. 내각제 국가는 의회 다수파가 필연적이어서 어느 쪽으로든 ‘결정’할 수 있지만 ‘만성적 여소야대’에 시달리는 우리 정치는 머리카락을 잘린 삼손처럼 ‘결정할 힘’을 잃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한국 정치의 파워 그룹은 군·관료·재벌·정치의 순이었을 것이다. 반독재 투쟁이 쉬웠던(?) 이유는 가장 힘이 센 사람, 가장 나쁜 사람, 가장 자주 보는 사람이 같은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투쟁의 목표와 이유가 분명했다. 단지 용기만 있으면 되었다. 이 전선으로부터 이탈하면 ‘어용’ 교수가 되고 ‘사쿠라’ 야당이 되던 시대였다. 3김의 전성기였던 1990년대는 정치·관료·재벌·언론의 순서였을 것이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고 있던 군은 전두환의 연희동 골목 성명을 끝으로 권력의 중심에서 사라졌다. 반면 언론은 이때가 전성기였으리라. 대통령도 만들 수 있고, 재벌도 망하게 할 수 있다고 스스로 믿던 시기였다.
그렇다면 지금은 누가 파워 그룹의 맨 꼭대기에 있는가? 누가 대한민국을 이끌고 있는가? 어떤 사람은 대통령과 청와대라고 단언하고, 어떤 사람은 정치라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재벌이라고 확신하고, 어떤 사람은 검찰이라고 믿고 있고, 어떤 사람은 관료 집단이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여전히 언론을 ‘밤의 대통령’으로 의심하고 있다. 영화에서도 가장 힘이 센 사람, 가장 나쁜 사람, 가장 자주 보는 사람이 다 다르게 묘사된다. 어용도 없고 사쿠라도 없는 혼돈의 시대다. 분노의 주체는 광장으로 나오지만 분노의 대상은 잘 보이지 않는다.
나는 관료·법조·재벌·정치의 순이라고 믿고 있다. 물론 관료들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관료는 부처별, 기관별, 기수별로 분산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이 갖고 있는 힘의 실체를 체감하지 못할 수 있지만 실제로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권력의 실체는 관료 집단이다. 문제는 이들이 군인이나 정치인보다 나라를 이끌어야 한다는 전략적 자각이 약하다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오너 마인드가 없다. 그저 ‘고용된’ 회사원의 마인드만 있을 뿐이다.
2000년대에 무섭게 약진한 파워 그룹은 법조다. 검찰, 대법원, 헌법재판소, 로펌을 망라한 법조는 때때로 민주적 통제를 벗어나 오만한 ‘신탁’의 권좌에 스스로 올랐다. 민주주의의 먹이사슬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정치는 유권자가 (선거를 통해) 통제하고, 국민은 관료·사법 체제에 의해 통제되고, 관료·사법 체제는 정치에 의해 (문민) 통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민주주의는 앞의 두 통제력은 여전하지만 정치의 관료·사법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위기를 맞고 있다.
군인은 물리력으로 지배했고, 3김은 카리스마와 정치력으로 지배했지만 지금 정치는 지배할 무기가 사실상 없다. 물리적 힘이나 권위가 없다면 정치인에게 꼭 필요한 자질인 통찰력·결단력·설득력·추진력을 인정받아야 세상을 이끌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데 솔직히 말해 지금의 정치인에게는 기대난망이다.
한국의 철학을 연구한 일본의 오구라 기조는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라는 책에서 조선 시대 지식인의 유형(선비, 사대부, 양반)으로 오늘날 한국 정치의 부도덕을 신랄하게 비판한 대목에서 놀라운 통찰을 보여주었다. “유교에서는 도덕과 권력과 부는 이상적으로는 삼위일체여야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이 삼위일체는 절망적일 정도로 불가능에 가깝다. 왜냐하면 도덕은 권력과 부와 결합되는 순간 부도덕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도덕쟁탈전이 전개된다. 이것은 도덕을 내세워 권력을 잡은 세력이 얼마나 도덕적이지 않은가를 폭로하는 싸움이다.”
‘선비’는 권력과 부를 가까이하는 것을 거부하고 오로지 학문의 세계에 침잠하여 이상(도덕)을 추구하는 자다. 역사상 선비 이미지의 대표 인물은 이퇴계이고, 현대 정치에서는 1970~1980년대의 ‘재야 지식인’들이다. ‘사대부’는 관료이자 지식인이다. 조선에서는 ‘사림’이 주자학을 받들면서 수구세력과 전면전을 벌였는데 이들이 전형적인 사대부의 이미지다. 이율곡이 대표적이다. 1990년대 김영삼·김대중에 의해 발탁된 ‘개혁파 정치인’들이 현대판 사대부라 할 만하다. ‘양반’은 도덕과 권력에 부까지 거머쥔다. 기득권의 상징으로 오늘날 대부분 정치인의 원형이다.
‘물질적 권위’와 ‘정신적 권위’를 모두 다 갖겠다는 것이 한국의 0.1%가 사는 독특한 방식이다. 이명박 정권에 대해 ‘정권’을 잡은 것이 아니라 ‘이권’을 잡았다는 신랄한 비판이 있었지만 이런 비판은 보수 정권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의 뿌리 깊은 문화다. 지금은 선비도 없고, 사대부도 없다. 돈과 권력을 가진 배부른 양반들이 도덕까지 지배하는 시대다. 정치는 비즈니스가 되었다.
학자, 기자, 법조인, 종교인, 작가, 시민운동가도 이제는 정신적 권위에 만족하지 않고, 권력과 부를 좇는다. 정체성이 약하니 윤리도 없다. 사회를 향한 ‘통찰’도 없고, 자신을 향한 ‘성찰’도 없으면 ‘현찰’만 챙기기 마련이다. 모두가 ‘직’을 좇을 뿐 ‘업’을 지키지 않는다.
정치의 시대를 이끌었던 3김은 오늘날 정치인과 세 가지 점에서 확실히 달랐다. 첫째, 그들은 ‘하나만 같아도 동지’로 보는 합목적적 유연함이 있었다. ‘하나만 달라도 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정치에는 맞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학자, 종교인, 법조인, 언론인, 시민운동을 하는 것이 낫다. 정치가는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공산주의 소련과 ‘연합’도 할 수 있어야 한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도 ‘3당 합당’과 ‘DJP 연합’을 했기 때문이다.
둘째, 그들은 정치를 ‘업’으로 했다. 목포상고를 나온 호남 출신의 김대중이 1997년 대권 도전 네 번 만에 70이 넘은 나이에 대통령이 되었을 때, 그런 불굴의 의지는 어디에서 나오는지 궁금했다. 처음에는 마키아벨리가 말한 ‘비르투(Virtu·권력의지)’의 힘으로 생각했으나 그게 아니라 정치를 ‘즐겼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김영삼도 그런 정치인이다. 그들은 국민들에게 꿈과 비전을 제시하고, 동지를 모으고, 당을 만들고, 언론의 주목을 받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선거에서 떨어져도 좌절하지 않고 계속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치는 정치를 좋아하는 사람이 해야 한다. 그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되고 싶을 뿐인 사람은 정치를 하면 안된다. 혼술, 혼밥 하는 사람이 정치를 잘할 수는 없다. 그들은 정치를 머리로 하고, 혼자 한다.
셋째, 그들은 지지자들에게 욕먹을 ‘용기’가 있었다. 요즘도 권력에 맞서는 정치인은 꽤 되지만 지지자들에게 욕먹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치인은 찾아보기 힘들다. 권력에 맞서는 것은 작은 용기만 있어도 되지만 지지자들에 맞서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해도 되지만 아무나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정치다.
[박성민의 정치 인사이드]정치는 즐기고 지지자에게 욕먹을 용기 있는 자가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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