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주류 한국당의 길
‘전략 없이 승리는 없다’ 야당의 가장 효과적인 전략은 정책적으로 무능한 정권 심판론
2012년 총선 때 야권 연대는 MB 심판·정권 교체 여론에도 정책 실패 공격 대신 이념 논쟁 결국 새누리당에 승리 안겨줘
10년 전인 2009년, 국회는 ‘한·미 FTA’를 반대하는 민주당의 점거 농성을 강제 해산하는 폭력 사태로 새해를 맞았다. 나는 국회에서 벌어진 폭력 사태에 대해 2009년 1월8일 중앙일보에 ‘민주주의와 그 적들’이라는 칼럼을 기고했다. “2009년 1월4일, 대한민국 국회는 공식적(?)으로 ‘통제 불능 상태’라고 선언됐다… 국회의 리얼 버라이어티는 지상파 방송의 쇼를 애들 장난으로 만들었다. 겨우 100여 명의 국회 경위가 300여 명의 농성자를 끌어내는 장면은 그야말로 ‘무한도전’이었다… 프로 레슬링은 ‘쇼’이기 때문에 비장한 얼굴, 불타는 복수심, 과장된 액션, 장외에서의 격돌, 환호와 야유, 그리고 무엇보다 흉포한 반칙이 동원된다. 진짜 격투기는 목숨을 걸고 싸우기 때문에 어떠한 반칙도 허용되지 않는다. 쇼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도 쇼가 아니다. 어떠한 반칙도 허용돼서는 안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다른 정치체제보다 아주 조금 나을 뿐인데 그 조금은 폭력을 쓰지 않는 데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번에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세 가지 폭력을 목격했다. 첫째, 물리적 폭력이다… 물리적인 폭력은 야만적인 것이다. 폭력이 미화되면 우리는 사회에서 야만과 싸울 수 없다. 둘째, 제도의 폭력이다… 민주주의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다수결이 정당성을 가지려면 ‘충분한 토론’을 거쳐야만 한다. 헌법재판소나 대법원도 마지막에는 다수결로 결정하지만 사람들이 그 결정을 존중하는 이유는 충분히 토론한 후에 내린 결정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셋째, 언어의 폭력이다… 민주주의의 힘은 말에서 나온다. 사람의 말이 그 사람의 인격을 보여주듯 정치인의 말은 민주주의의 수준을 보여준다. 분노와 증오, 경멸의 말은 민주주의의 적이다… 민주주의의 역사는 폭력에 저항한 역사다. 민주주의는 폭력을 수단으로 갖지 않는다. 폭력은 민주주의의 친구가 아니라 적이다. 폭력으로 민주주의를 지킨다는 말을 나는 믿지 않지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더욱 믿지 않는다. 폭력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사람은 민주주의자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폭력을 적으로 두고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제도라는 훨씬 위대한 친구들이 있기 때문이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한국 정치는 바뀌기는커녕 오히려 절망이라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렸다. 정치는 승패를 다툰다는 점에서 전쟁과 스포츠와 본질이 같다. 정치는 전쟁과 스포츠 중간 어딘가에 있을 텐데 스포츠처럼 룰을 정해 놓고 전쟁처럼 싸운다. 상대를 대하는 태도는 전쟁과 스포츠가 크게 다른데 전쟁은 상대를 ‘적’이라 부르고 스포츠는 ‘경쟁자’라 부른다. 19세기 이전에는 전쟁, 혁명, 재판, 사화 모두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를 결정하는 진검 승부였기 때문에 ‘승리한 자가 패배한 자를 죽이는 것’이 정치의 본질이었다.
아마도 19세기 이전에는 정치적 투쟁이 ‘체제 안에서’ 싸운 것이 아니라 ‘체제를 둘러싸고’ 싸웠기 때문일 것이다. 전쟁 같은 정치의 시대가 끝나자 민주주의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상대를 ‘죽일’ 적으로 보지 않고, ‘이길’ 경쟁자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승리하면 여당이 되고 패배하면 야당이 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애덤 셰보르스키의 정의대로 민주주의란 ‘여당이 (평화적으로) 야당이 될 가능성을 열어두는 체제’인 것이다. 우리는 이긴 자가 진 자를 죽이는 ‘쿠데타’와 ‘혁명’을 동시에 폐기처분하고 선거를 통한 ‘평화적 정권교체’가 가능한 체제를 1987년에 합의했다.
전쟁과 스포츠의 결정적 차이가 있다. 전쟁은 (승자와 패자) 모두를 패자로 만들고, 스포츠는 모두를 승자로 만든다. 전쟁은 참혹하지만 스포츠는 감동을 준다. 공정한 룰, 치열한 경쟁, 깨끗한 승복은 모두를 승자로 만든다. 정치가 배워야 할 교훈은 이것이다. 상대를 ‘청산’의 대상으로 보는 전쟁의 정치는 보복의 도돌이표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2009년 5월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이후 한국 정치는 피의 보복을 부르는 덫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길게는 1987년, 짧게는 2009년과 비교했을 때 겉으로 보이는 정치 행태는 비슷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엄청난 정치 지형의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가장 놀라운 변화는 ‘보수의 몰락’이다. 대한민국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보수가 주류에서 비주류로, 상수에서 변수로 전락했다. 상상할 수도 없었던 변화다. 지난 30년간 한국 정치 지형은 민자당 대 반민자당, 한나라당 대 반한나라당, 새누리당 대 반새누리당이었다. 보수가 주류고 상수였다. 보수 정당만이 연합 없이, 연대 없이 독자적으로 집권이 가능했다. 2017년 이후 한국 정치 지형은 민주당 대 반민주당이다. 민주당이 주류고 상수인 시대다. 믿을 수 없는 혁명적 반전이다.
한국 정치의 주류가 교체되고 있다. 보수가 비주류가 된 것, 사분오열된 것, 이끌 지도자가 사라진 것 모두 사상 초유의 일이다. 한국의 보수는 힘도 잃고, 길도 잃고, 꿈도 잃었다. 히말라야가 무너지면 에베레스트의 아우라도 사라진다. 보수의 페르소나 박근혜가 몰락하자 보수의 아우라도 사라졌다. 세상을 ‘북한’의 프리즘으로 보는 반공 보수와 ‘돈’의 프리즘으로 보는 시장 보수의 (정치 시장에서의) 점유율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보수에 대한 이미지는 ‘부패했다’ ‘촌스럽다’ ‘존경할 인물이 없다’에서 ‘능력도 없다’가 추가됐다. 마지막 보루마저 무너졌다.
보수의 시대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것이다. 한때 세계 휴대전화 시장을 지배했던 노키아와 모토로라가 스마트폰 시대의 새로운 강자인 애플과 삼성으로부터 패권의 지위를 다시 찾아올 가능성과 비슷할 것이다. 그들은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혁신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순간에 몰락했다.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라는 책으로 유명한 앨버트 O 허시먼은 또 다른 책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Exit(이탈), Voice(항의), and Loyalty(충성)>에서 ‘퇴보하는 기업, 조직, 국가에 대한 반응’을 연구했는데 그의 가설에 빗대서 보수의 몰락을 설명할 수 있다. 그에 의하면 어떤 조직이나 (조직이 퇴보하는 것 같아) 구성원이 불만을 갖는 시점이 있다. 불만을 갖는 시점, 불만을 표출하는 시점(항의), 조직을 떠나는 시점(이탈)의 프로세스에서 조직에 대한 충성심은 조직을 떠나는 시점을 조금 더 늦추고 개선을 위한 항의를 적극적으로 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과한 충성심은 항의나 이탈을 ‘이단’ 또는 ‘반역’으로 간주해 불만의 표출을 억제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퇴보에 대한 피드백 없이 구성원의 탈퇴로 이어진다고 설명했다. 그의 가설은 국가나 기업만이 아니라 정당, 식당, 교회, 학교 등 모든 조직에 적용할 수 있다.
좌파 독재 타도·우파 결집… 보수층만 노린 한국당의 행보 반대 세력 똘똘 뭉치게 해 ‘야당 심판’ 프레임 작동할 수도
“적이 예상하는 방법으로는 결코 싸우지 않았다” 전력 약한 한국당이 이기려면 베트남 전쟁 영웅의 말 새겨야
김영삼이 이끌던 신한국당과 이회창, 이명박이 이끌던 한나라당 시절만 하더라도 보수에 대한 충성은 개혁파들의 혁신 목소리(항의)를 허용함으로써 이탈을 막았으나 박근혜의 새누리당과 지금의 자유한국당은 ‘이념적 자폐’에 빠져 개혁파들의 항의 목소리를 ‘배신’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결국 이들을 모두 이탈(탈당)하도록 만들었다.
1990년에 3당 합당으로 태어난 ‘보수 동맹’은 TK에 기반한 이회창, 이명박, 박근혜 시대를 거치면서 서서히 붕괴됐다. 한국 유권자 지형에서 30% 정도 되는 ‘중도보수’가 2017년 동맹으로부터 이탈함으로써 3당 합당 구조는 완전히 해체됐다. 이들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보수 동맹을 ‘배신’했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탄핵’에 대한 태도는 진보 유권자와 거의 같다. 자유한국당이 지금처럼 탄핵을 부정하거나, 소극적으로 인정하는 태도에 머무른다면 이들은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 이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보수의 주류 복귀는 불가능하다.
자유한국당은 패스트트랙 정국에서 세 가지는 얻었다. 첫째, 문재인 정권에 맞서 싸우는 건 자유한국당뿐이라는 이미지를 얻었다. 둘째, 2018년 지방선거를 정점으로 ‘박근혜 청산’에서 ‘반문재인’으로 돌아서고 있는 중도 보수의 지지를 얻었다. 셋째, 당 지도부의 리더십이 강화됐다. 단기적으로는 지지율이 민주당과 동반상승할 가능성이 크다. 정치에서는 이슈를 주도하거나(민주당) 반대하는(자유한국당) 세력만이 지지를 얻기 때문이다. 동조하는 것은 침묵하는 것보다도 나쁜 전략이다. 바른미래당 내에서 전략적 오류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중도 보수를 견인할 수 있도록 선명한 반문재인 전선에 섰어야 한다는 것이다.
잃은 것도 많다. 첫째, 새누리당이 주도적으로 만든 국회선진화법을 물리력으로 무력화시켰다. 둘째, 당장은 반문재인 지지를 결집시킬 수 있으나 총선에서 중도보수의 지지를 얻는 데는 독이 될 수 있다. 셋째, 중도보수를 대변하는 세력과의 보수 통합이 더 어려워졌다. 넷째, 총선에서 정권 심판이 아니라 ‘자유한국당 심판’의 프레임이 작동할 가능성이 커졌다.
선거 전략은 단순하다. 나에 대한 지지를 강화하고, 나에 대한 반대를 약화시키고, 상대에 대한 반대를 강화하고, 상대에 대한 지지를 약화시키는 것이다. 그게 전부다. 선거 캠페인에서 메시지, 프레임, 정책, 인물, 이슈, 조직, 홍보는 이 네 가지 중 어느 하나를 목표로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최근 자유한국당의 행보는 전략적이지 않다.
야당의 가장 효과적인 선거 전략은 ‘무능한’ 정권 심판론이다. 경제 상황이 좋지 않고 외교, 안보, 인사 등 국내외 정책에서 정권이 국민의 지지를 잃을 때 야당은 이념적 ‘진영’ 논리를 벗어나 정책의 실패를 구체적으로 공격하면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좋은 전략이다.
캠페인 전문가로서 자유한국당에 전략적 조언을 한다면 1. 민주당(혹은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반대 강화, 2. 자유한국당에 대한 반대 약화, 3. 민주당에 대한 지지 약화, 4. 자유한국당에 대한 지지 강화의 순으로 전략적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 좋다. 그런데 자유한국당은 4, 1, 3, 2의 순으로 잘못된 전략적 행보를 하고 있다.
중도보수를 비롯한 보수 유권자가 ‘반문재인’으로 돌아선 지금의 상황에서는 굳이 지지층 결집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처럼 이미 자유한국당을 지지하고 있고, 이탈할 가능성도 거의 없는 보수층만 바라보는 행보를 한다면 2012년 민주당처럼 총선에서 ‘야당 심판’의 프레임이 작동할 위험이 커진다.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패하고 이명박 정권 심판과 정권 교체에 대한 여론이 비등해지고 있는 상황인데도 야권 연대를 한 민주당과 통합진보당이 (국민성공시대를 약속한 이명박 정부의) 정책 실패를 공격하지 않고 불필요한 이념 논쟁으로 ‘진영’ 싸움으로 몰고 간 결과 새누리당에 승리를 안겨주었다. ‘좌파 독재 타도’ ‘자유 우파 결집’ ‘북한 지령 받는 국민청원’과 같은 과격한 진영 논리는 집권 세력의 실정을 덮어주고 반자유한국당 세력을 똘똘 뭉치게 하고, 총선에서 ‘자유한국당 심판’ 프레임만 먹히게 할 뿐이다.
전쟁, 선거, 스포츠 모두 전력·전략·정신력에서 승패가 갈린다. 전력이 약한 자유한국당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프랑스, 미국과 싸워 이긴 베트남의 전쟁 영웅 보응우옌잡의 전략적 고언을 새겨들어야 한다. 강대국과 싸워 이긴 비결을 묻는 질문에 “적이 원하는 장소에서 싸우지 않았다. 적이 원하는 시간에 싸우지 않았다. 적이 예상하는 방법으로 싸우지 않았다”며 세 가지 전략적 원칙을 지킨 것이 비결이라고 답했다. 지금 자유한국당은 적이 원하는 장소에서, 적이 원하는 시간에, 적이 원하는 방법으로 싸우고 있다.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다. 자유한국당은 ‘전략 없이 승리 없다’는 승부 세계의 기본 원칙을 되새겨야 한다. 지금은 머리를 삭발할 때가 아니라 머리를 쓸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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