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승패 결정할 키워드 ‘미래’
모든 정치 세력이 아주 오래된 과거에 집착할 뿐, 어느 누구도 미래를 얘기하지 못한다…참담한 현실이다
프랑스의 시인이자 사상가인 폴 발레리가 남긴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멋있는 말은 내 삶의 모토였다.
마거릿 대처를 다룬 영화 <철의 여인>에도 생각에 대한 좋은 대사가 나온다. “생각을 조심해, 생각은 말이 되니까. 말을 조심해, 말은 행동이 되니까. 행동을 조심해, 행동은 습관이 되니까. 습관을 조심해, 습관은 인격이 되니까. 인격을 조심해, 인격은 운명이 되니까.”
나는 (승리를 위한) 정치 캠페인의 전략 프레임과 메시지를 고민하는 정치 컨설턴트로서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대해 오랫동안 관찰했다. 대니얼 카너먼의 <생각에 관한 생각>, 대니얼 길버트의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 최인철의 <프레임> 같은 인지심리학이나 행동경제학은 대중의 정치적 결정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이해하는 데 많은 영감을 주었다.
대중이나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는 전략적 방법의 전문가인 스튜어트 다이아몬드의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 로버트 치알디니의 <설득의 심리학>, 미국 공화당의 미디어 전략 책임자 프랭크 런츠의 <먹히는 말>, 커뮤니케이션 전문가 김호의 <그렇게 물어보면 원하는 답을 들을 수 없습니다>와 같은 책도 생각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
그러나 솔직히 고백하자면 30년간 정치 현장에서 관찰하고, 공부하고, 경험을 쌓았지만 요즘은 세상의 변화와 대중의 생각을 읽는 데 갈수록 자신이 없다.
세계적인 언어학자인 놈 촘스키는 <언어에 대한 지식>에서 버트런드 러셀과 조지 오웰을 인용해서 ‘플라톤 테제’와 ‘오웰 테제’를 대비시킨다. 플라톤 테제는 러셀이 말한 ‘세상과의 접촉이 짧고, 개인적이며, 제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어떻게 그렇게 많은 지식을 알 수 있을까?’로 집약된다. 반대로 오웰 테제는 ‘이렇게 많은 자료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인간은 이다지도 조금밖에 알 수 없는가?’로 요약된다. 러셀은 ‘인간 이성의 가능성’에 주목했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을 고양시키는 계몽에 주력했고, 오웰은 전체주의 사회의 ‘인간 의식의 조작 가능성’을 경고한 것이다.
AI시대다, 여론이 아니라 여론조사가 국정을 좌우한다
여의도에 ‘소음’이 넘친다…가짜뉴스와 음모론이 극성이다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지 않는 정보는 무시하는 확증편향에 빠져있다
누구나 주관적으로 말할 자유가 있지만 거짓을 말할 권리까지는 아니다
그토록 많은 데이터와 정보가 미래를 예측하는 데 정말 도움이 될까
촛불보다 투표가 힘이 세고 투표보다는 제도가 힘이 세다
지금 총선 결과를 예측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지만 다만 분명한 것은
‘혁신·미래·새로움·통합’을 차지하는 정당이 승리할 것이다
지금은 ‘데이터’의 시대다. 데이터가 돈이고 권력이다. 365일 24시간 내내 상상할 수도 없는 양의 정보와 데이터가 쏟아진다. 이른바 ‘빅’ 데이터 시대다. 모두가 데이터를 생산하고 소비한다. 숫자는 마력이 있다. 소수점은 더 그렇다. 50%보다는 47%가 그럴듯하고, 43.2%는 더 그럴듯하다. 여론이 아니라 여론조사가 국정을 좌우한다. 그 많은 정보와 데이터는 미래를 예측하는 데 정말로 도움이 될까?
2012년 미국 대통령 선거 결과를 주 단위로 승자와 득표율까지 거의 정확히 예측했던 통계전문가 네이트 실버는 <신호와 소음>에서 어떻게 잘못된 정보(소음)를 거르고 진짜 의미 있는 정보(신호)를 찾을 수 있는지를 여러 사례를 들어 설명했다. “소음에서 신호를 분리하려면 과학적 지식과 자기 인식을 동시에 갖추어야 한다. …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겸손’과 예측할 수 있는 것을 예측하는 ‘용기’, 그리고 이들 사이의 차이를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흔히 실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우리의 능력을 더 겸손하게 평가함으로써 실수를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
여의도에는 소음이 넘친다. 한편에서는 종편에서 정보를 얻고, 또 다른 편에서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유튜브를 통해 정보를 얻는다. 엄청난 정보를 접하지만 (균형을 잃었기 때문에)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정보만 받아들이고 신념과 일치하지 않는 정보는 무시하는 ‘확증편향’에 빠져 올바른 판단을 할 능력을 잃었다. 나는 소음 때문에 신호를 놓칠까봐 보지도(종편), 하지도(SNS), 듣지도(유튜브) 않는 차단의 원칙을 택했다.
빅 데이터, 인공지능(AI) 시대여서 진실과 사실이 쉽게 드러날 것 같지만 현실은 (그럴듯해 보이는 정보와 데이터로 포장되어 있어) 속기 쉬운 ‘가짜뉴스’와 ‘음모론’이 더 극성이다. 나는 음모론을 믿지 않지만 음모론을 주장하는 사람은 더 믿지 않는다. 열 명 이상 아는 비밀은 유지가 불가능하다. 세상에 떠도는 대부분의 음모론은 최소한 백 명 이상이 말을 맞추어야 하는데 그게 가능한 일인가. 현실은 영화보다는 상식적으로 돌아간다. 음모론으로 사익을 챙기는 사람일수록 ‘공개하면 깜짝 놀랄 만한’ 대단한 정보통이 있는 듯이 말하지만 믿을 만한 정보통에 의하면 그건 대개 사실이 아니란다.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방송 토론에서 “진영으로 나뉘어서 서로 대립하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불가피하고 자연스럽다. … 진영 논리가 왜 나쁜가. 주권자 보고, 시민 보고 진영 논리에 빠지지 말라는 말만큼 멍청한 말이 없다. 이미 대부분의 언론은 특정 진영에 빠져 있다. 진영 논리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주장 자체가 진영 논리”라고 했는데 이런 주장은 민주주의의 중요한 일면을 잘 설명한 것이다.
누구나 정치적 이슈에 대해 객관적·중립적이 아니라 주관적·당파적으로 말할 자유가 있다. 다만 아무도 허위사실을 유포하거나 거짓을 말할 권리까지 얻은 건 아니다.
E E 샤츠슈나이더는 <절반의 인민주권>에서 정치를 갈등을 동원하고, 관리하며, 통합하는 역할로 정의했다. ‘갈등의 조직화’ ‘갈등의 사회화’가 정치의 핵심이라고 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유시민 이사장의 논리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샤츠슈나이더가 민주주의를 ‘인민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인민의 동의에 의한 지배’라는 정의를 통해 ‘정당 정치’가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강조한 것을 간과하면 안된다.
오늘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는 ‘광장’에서 오고 있다. 스마트폰과 SNS 네트워크로 조직화된 시민들은 광화문, 서초동, 여의도에서 대통령, 검찰, 법원, 언론, 국회를 무차별 공격하고 있다.
브레넌이 ‘Against Democracy’에서 ‘훌리건’으로 부른 정치적 극성 팬덤은 유튜브, 인터넷, 광장, SNS, 스마트폰 문자로 ‘적’을 잔인하게 섬멸한다. 악명 높은 훌리건은 두려움과 공포의 상징이다. 브레넌이 합리적이고 과학적 견해를 가진 시민으로 호칭한 ‘벌컨’은 두려움과 공포 앞에 떨고 있다.
나는 ‘촛불’보다는 ‘투표’가 힘이 세고, 투표보다는 ‘제도’가 힘이 세다고 믿고 있다. 2016년 겨울을 뜨겁게 달군 촛불은 2016년 12월9일 국회의원 234명이 탄핵에 찬성하고, 2017년 3월10일 헌법재판관 8명 전원 일치 의견으로 박근혜 대통령 파면 결정을 내림으로써 결실을 맺었다. 국회가 압도적 찬성으로 탄핵할 수 있었던 것은 국민 80% 이상이 탄핵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1987년 6월 민주항쟁도 (국민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직선제 개헌’을 통해 ‘1987 체제’를 열 수 있었다.
(국민 절대 다수의 지지 없이) 진영으로 짝 갈려 각자의 광장에서 민주주의 제도의 근간을 공격하는 것은 위험한 현상이다. 니얼 퍼거슨은 <광장과 타워>에서 네트워크(광장)가 위계(타워)를 무너뜨려온 역사적 사례가 있긴 있지만 네트워크가 언제나 올바른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공정한 위계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수평적 네트워크는 선하고 수직적 위계는 악하다’고 믿는 통념을 비판하면서 네트워크의 무질서, (사악한 의도를 가진) 거짓 정보에 감염될 가능성, 정치적 위계에 위협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조지 오웰과 마찬가지로 그도 ‘인간 의식의 조작 가능성’을 날카롭게 통찰했다.
바야흐로 유튜버의 시대다. 그들의 권위는 막강하다. 신도들에게 그들은 교주다. ‘조국 수호’와 ‘검찰개혁’의 근거도 백 가지가 넘고, ‘조국 구속’과 ‘공수처 반대’의 근거도 백 가지가 넘기 때문에 갖다 팔 물건은 충분하다. 단지 어느 진영에 설 것인가만 결정하면 된다. 노무현 정부 때 <메이드 인 USA>의 저자인 프랑스의 문명 비평가 기 소르망이 한국을 방문해서 “요즘 한국과 프랑스에서는 반미가 유행인데 이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고는 “반미가 미국에 대한 태도는 아니죠. 그저 하나의 선택일 뿐입니다”라고 답했는데, 그 뜻은 누군가가 친미의 입장을 선점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반미를 하기로’ 정했다는 냉소적인 비판이었다. 지식인인 양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조롱이었다.
유튜버에게 민주공화국의 시민으로서 공동체에 대한 책임이나 국민 통합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정치인은 달라야 한다. 민주공화국의 제도적 기반인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를 허물면 안된다.
오래된 개그가 생각난다. 어떤 사람이 선배에게 찾아와 “형, 졸려 죽겠는데 어떻게 하면 잠을 깰 수 있을까”라고 물으니 선배가 공을 건네주며 남의 집 담장 안으로 던지라고 한다. 시키는 대로 했더니 안에서 장독 깨지는 소리가 나면서 화난 주인이 달려 나왔다. 후배가 “형, 졸음 깨게 해 달랬더니 이렇게 큰 사고를 치게 만들면 어떡해”라며 하소연하자 “너 지금 안 졸리지? 그럼 잠은 깼고, 이제부터는 남의 집 장독을 깼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해보자”는 게 아닌가.
아무리 ‘검찰개혁’이 문재인 정부의 최우선 국정과제이고, 조국 장관이 유일무이한 적임자라고 하더라도 그보다 훨씬 중요한 민주공화국의 가치(법치·공정)를 훼손하면서까지 밀어붙일 일은 아니었다. 정치가 국민과 시민을 ‘광장’으로 내몰고 사실상 ‘내전’을 선동하더니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넘어가려 한다. 잘못된 판단에 대한 인정도, 사과도, 책임도 없다.
정치는 갈등의 조직화가 본령이니 싸우는 게 당연하다. 다만 상대를 ‘죽일’ 적으로 보지 않고 ‘이길’ 경쟁자로 본다는 점에서 전쟁보다는 스포츠에 더 가깝다. 폭력을 배제하고 말로 싸운다는 점에서 민주주의는 다른 체제보다 우월하다.
솔직히 말해 정치는 ‘기득권’과 ‘기득권이 되고자 하는 자’의 싸움이다. 기득권은 합법적으로 얻은 권리다. 나쁜 게 아니다. ‘혁신’은 기득권을 유지하거나 확장하는 수단이다. 기업의 제품 혁신도 시장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서다. 문재인 민주당 대표와 박근혜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이 당 혁신을 한 것은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다. 혁신이 멈추면 기득권을 잃고 몰락한다. 국가, 기업, 정권 모두 예외가 없다. 대통령과 집권당이 혁신을 외면하다 정권을 잃게 되는 것은 ‘집권’ 목표만 있었지, ‘집권 후’ 목표가 없었기 때문이다.
기업은 ‘고객이 갖기를 원하나, 자기들은 만들 수 없는 것’을 파는 것이다. 꼭 갖고 싶거나, 없어서는 안되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Only One’ ‘Number One’ 기업이 시장을 지배한다. 좋은 제품을 만들면 좋은 기업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국내에서 최고의 기업이 되려면 제품만으로는 안된다. 회사 브랜드 자체가 신뢰를 얻어야 한다. 세계적인 기업이 되려면 제품이나 회사 브랜드를 넘어 ‘꿈’을 팔아야 한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좋은 정책을 만들면 좋은 정당은 될 수 있지만 지배적인 정당이 되기는 어렵다. 집권하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의 전략적 자산’으로 (스윙보터인) 중도의 신뢰를 받아야 한다. 극단적 지지층이 두려워 ‘보수의 전략적 자산’이 되거나, ‘진보의 전략적 자산’이 되거나, 더 극단적으로 ‘특정 계파의 전략적 자산’으로 기반을 좁히면 기득권을 유지하거나 확장할 수 없다.
중도가 보기에 (보수와 진보, 좌우를 넘어) “대한민국을 위해 저 정당은 필요하지, 저 정치인은 꼭 있어야지”라고 평가받는 정당과 정치인은 살아남지만, 진영 논리에 빠져 시민의 ‘생각’을 억압하고, 낙인찍고, 강제하는 정당과 정치인은 몰락할 것이다. 다양, 포용, 개방 속에서만 혁신이 나온다. 획일, 배타, 폐쇄 속에서는 기득권만 득실거릴 뿐이다. 내가 변해야 한다는 생각이 혁신이고, 남이 변해야 한다는 생각은 기득권이다.
지금 시점에서 총선 결과를 예측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다만 정치의 네 가지 전선, 즉 혁신 대 기득권, 미래 대 과거, 새로움 대 낡음, 통합 대 분열에서 앞의 네 자리를 차지하는 정당이 승리하고 뒷자리를 차지하는 정당이 패배할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조국 내전’을 거치면서 드러난 대한민국은 좌우(둘 다 부패했고 둘 다 무능하다)의 문제도 심각하고, 위아래(반칙, 특권, 불공정이 드러났다)의 문제도 심각하지만 대한민국의 치명적 병은 앞뒤의 문제다. 한마디로 모든 정치 세력이 과거에 집착할 뿐 누구도 미래를 얘기하지 않는다(못한다). 대한민국의 참담한 현실이다. 한 국가의 힘은 생각의 힘이고, 질문의 힘이고 기술의 힘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기득권이 혁신을 가로막고, 과거가 미래를 짓누르고, 낡음이 새로움을 거부하는 나라다.
AI 시대에 경쟁국이 앞을 보고 달려가는데 우리는 뒤를 보고 걷고 있다. 뒤를 보면서 걸으면 빨리 갈 수도, 멀리 갈 수도, 똑바로 갈 수도 없다. 내년 총선의 승패를 결정할 혁신의 키워드는 ‘미래’다. 지역·이념 갈등을 뒤로하고 계층·세대 갈등의 새로운 전쟁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