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재기의 첫걸음은 ‘책임지기’
러시아 월드컵에서도 ‘디펜딩 챔피언 징크스’는 계속되고 있다. 세계 랭킹 1위이자 강력한 우승후보인 디펜딩 챔피언 독일이 80년 만에 처음으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영국의 일간지 ‘데일리 메일’은 한국이 독일을 2 대 0으로 격파한 경기를 역대 월드컵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경기 2위로 선정했다. 1위는 2014년 독일이 개최국 브라질을 7 대 1로 이긴 경기였는데 이 한 경기로 인해 브라질 축구의 아우라는 한순간에 사라졌다.
독일 대표팀의 토니 크로스는 2017년 새해를 맞아 ‘해피 2017’이란 트윗을 올리면서 1과 7자리에 브라질과 독일 국기를 이모티콘으로 써 브라질에 상처를 입혔는데 이번에 똑같이 되돌려 받았다. 브라질의 스포츠 매체인 ‘랜스스포츠’는 ‘해피 2018’을 올리면서 2와 0자리에 태극기와 독일기를 넣어 되갚아 주었다.
‘전차군단’이라는 강인한 별칭이 보여주듯 독일 축구의 강점은 전자기계 같은 조직력이다. 상대를 압도하는 체력,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조직력이 독일 축구에는 있다. ‘팀 독일’이라는 일체감, 승리를 향한 집념, 국가대표로서의 자긍심도 다른 나라를 압도한다. 그러나 이번 독일 대표팀은 ‘팀 스피릿’이 보이지 않았다. 브라질이나 독일 같은 강팀도 조직적 규율이 무너지면 역사적 참패를 당할 수밖에 없다.
자유한국당이 지방선거에서 역사적 참패를 당했다. 2006년 지방선거에서 거둔 역사적 승리를 지워버리는 참혹한 패배다. 월드컵 사상 가장 충격적인 패배 1·2위를 기록한 브라질과 독일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브라질과 독일은 (패배를 극복하고) 다시 돌아와 승리할 저력이 있지만 자유한국당은 2020년 총선에서 승리할 희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자유한국당은 ‘죽음에 이르는 병’인 절망에 빠졌다. 2016년 총선에서 조짐이 보였다. 보수의 보루인 강남과 대구마저 뚫리면서 더불어민주당에 1당을 내주었다. PK는 보수의 텃밭이라고 주장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흔들렸다.
그 정도의 참패를 당하면 책임을 지는 것이 (상식적) 정치 윤리다. 그러나 노골적으로 공천에 개입한 청와대와 (이한구 공천심사위원장을 내세워) 공천을 좌지우지한 당내 주류인 친박은 책임을 지기는커녕 전당대회에서 당을 장악했다. 그때 이정현 대표가 아닌 다른 사람이 당대표가 되었다면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과 구속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거국 내각’으로 타협이 가능할 수도 있었다. 전력도 약하고, 전략도 없는데 (무모하게) 이길 수 없는 전쟁을 밀어붙이다가 참담한 패배를 당했다. 2017년 대선 패배 후에도 기회가 있었다. 구원투수로 나섰던 홍준표가 패배의 책임을 지고 뒤로 물러났다면 정치적 재기의 기회가 있었을 텐데 (무리하게) 선발투수로 나섰다가 당과 자신 모두 회복할 수 없는 상태에 빠뜨렸다.
자유한국당이 또다시 비대위 체제로 갈 모양이다. 한국 정당은 비상이 일상이다. 지금은 전당대회라는 수술을 받을 체력이 안되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조기 전당대회가 안된다면 내년 1~2월이 현실적이다. 6개월 이상 비대위 체제로 가야 한다면 ‘(중도·보수)통합 신당’이라는 목표를 명분으로 내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공적인 결과는 기대난망이다. 비대위가 성공하려면 총선을 앞둔 시점이거나, 당내 ‘대주주’가 직접 나설 때다. 2016년 민주당의 ‘김종인 비대위’는 앞의 조건을 만족시켰고, 2012년 새누리당 ‘박근혜 비대위’는 두 가지 조건 모두 충족시켰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선거 패배 직후에, 외부 인사가 맡는 비대위(혁신위)는 성공한 사례가 없다.
패배할 것 같은 두려움이 몰려오고 승리에 대한 절박함이 극에 달할 때, (생살여탈권까지 포함된) ‘전권’을 위임받은 비대위가 들어서야 성공 가능성이 있다. 당 이름도 맘대로 바꿔도 된다. 숙청하듯이 본보기로 ‘거물’을 날려도 저항하지 못한다. 모두가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 하나로 굴욕을 참아낸다. 한마디로 ‘비상계엄’이다. 계엄사령관인 비대위원장의 말이 곧 법이다. 그가 엄지손가락을 올리면 살고, 내리면 죽는다. 당도 개인도 ‘살고 보자’는 생존 본능만 남았을 때, 혁명과 혁신은 성공한다.
지금은 그런 때가 아니다. 더군다나 자유한국당처럼 팀에 대한 희생과 헌신은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자신의 생존만 걱정하는 조직 풍토에서는 백약이 무효다. 당파 싸움보다 무서운 게 계파 싸움이다. 친박에 의해 탈당을 요구받고 있는 김무성 의원은 ‘당원동지 여러분께 드리는 호소문’에서 “정치권의 모든 싸움은 공천권 싸움입니다. 공천권을 확보하기 위해 계보를 만들고 줄 세우기에 나서는 것입니다. (…) 참신하고 능력 있는 외부인사를 영입할 수 길을 열어줘야 합니다. 당내 역량을 지닌 인사들을 존중하되 새로운 인재영입에도 힘을 기울여 ‘인재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라고 했는데, 참신하고 능력 있는 외부 인재가 들어오기 위해서는 ‘친박’이 자리를 비워줘야 한다는 뜻으로 읽힌다.
김무성, 김성태 중심의 복당파는 지방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홍준표 대표가 물러나면 자유한국당을 접수(?)할 수 있다는 계산으로 복당했겠지만 자유한국당은 존속 가치보다 청산 가치가 더 크다는 게 당 밖의 대체적 평가다. ‘탈당’보다 ‘복당’이 명분이 없었다. 김무성 의원은 호소문에서 “정당은 오직 국민의 지지기반 위에서 존립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지만 왜 국민의 지지를 잃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모르는 듯하다.
한국의 유권자 지형을 거칠게 분류하면 30 : 20 : 30 : 20이다. 맨 앞의 30%는 2007년 정동영과 권영길의 지지율 합이다. 어떤 경우에도 보수 정당을 지지하지 않는다. 마지막 20%는 이른바 ‘태극기’다. 어떤 경우에도 진보 정당을 찍지 않는다. 두 번째, 세 번째 그룹은 ‘스윙 보터’다. 앞의 20%에는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을 찍은 유권자가 꽤 될 것이고, 뒤의 30%에는 이번 지방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를 찍은 사람들이 꽤 될 것이다. 자유한국당 위기의 핵심은 세 번째 30% 그룹의 분노가 (아직까지도) 가라앉지 않는 현실이다. 탄핵 찬성 여론이 80%였고, 박근혜 대통령 구속 여론과 문재인 대통령 직무 평가 지지율이 70%를 넘는 것은 이 그룹이 앞의 두 그룹과 ‘같은’ 정치적 선택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팀’을 위한 책임·희생·헌신 찾아볼 수 없는 한국당 ‘직’을 좇는 정치 풍토 속에서 자신의 생존 위한 계파 싸움만 2017년 대선 이어 2018년 지방선거에서도 ‘역사적 참패’ 박근혜와 한국당에 대한 지지자들의 분노가 여전한데 책임지고 부끄러움과 자괴감 씻어주는 이는 아무도 없어 떠난 30%가 돌아오지 않으면 2020년 한국당은 소멸할 것이다
이번 지방선거에서는 (앞의 두 그룹에서 정의당을 포함한 진보 정당 지지층을 뺀다면) 세 번째 그룹에서 적어도 15~20%가 민주당 후보를 찍은 것으로 보인다. 20년 이상 신한국당, 한나라당, 새누리당을 지지해 왔고, 김영삼·이회창·이명박·박근혜를 찍었던 그들이 박근혜와 자유한국당 의원들에 대해 느끼는 배신감이 어느 정도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분노의 핵심은 자신들이 느끼는 자괴감과 부끄러움을 아무도 ‘씻어주지 않는다’는 것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9년 4월22일 “‘사람 세상’ 홈페이지를 닫아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 더 이상 노무현은 여러분이 추구하는 가치의 상징이 될 수가 없다. 저는 이미 민주주의, 진보, 정의 이런 말을 할 자격을 잃어버렸다. 저는 이미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져 있다. 여러분은 이 수렁에 함께 빠져서는 안된다. 여러분은 저를 버리셔야 한다”고 함으로써 자신의 속죄가 지지자들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했다. 부끄러움은 자신의 몫이라고 진솔하게 용서를 구한 것이다.
지금 보수 정당을 지지해왔던 세 번째 그룹은 “부끄러움이 왜 우리 몫이어야 하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자유한국당과 정치적 대척점에 있는 더불어민주당에 투표함으로써 분노를 극대화시켰다. 김성태 원내대표는 지방선거 직후 “이번 선거는 국민들이 자유한국당을 탄핵한 선거입니다”라고 정확히 규정했지만 누구도 ‘탄핵’에 걸맞은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런 상황이라면 세 번째 그룹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2020년 자유한국당은 소멸할 것이다.
이들을 합리적 보수, 중도 보수, 리버럴 등 어떻게 부르든 상관없이, 이들이 떠났다는 것은 1990년 3당 합당 체제가 완전히 해체됐음을 의미한다. 새로 유입된 지지층을 붙잡기 위해 민주당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놓치면 안되는 상징적 장면이 있다.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와 민주당 광역단체장 당선인 12인은 6월15일 현충원을 찾아 김대중·김영삼 대통령 묘역을 참배했다. 이 자리에서 추미애 대표는 “6·13 지방선거 승리는 두 분 대통령께서 뿌려놓으신 민주주의와 평화, 그리고 낡은 지역주의와 색깔론에 맞서 싸워온 두 대통령이 뿌린 씨앗이 열매를 맺은 것이라 생각된다”고 함으로써 김영삼을 복권(?)시켰다. 김영삼의 복권은 1990년 체제가 완전히 종말을 고했다는 역사적 승리 선언이다. 이로써 노무현과 문재인이 간절히 꿈꿔 왔던 (PK를 중심으로) ‘영남의 주류교체’가 현실이 된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영남의 주류교체’를 꿈꿨지만, 문재인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주류교체’를 꿈꾸고 있다. YS의 복권은 영남 주류교체의 의미가 있다면, JP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한 것은 대한민국 주류교체의 의미가 있다. 1990년 이전의 김영삼과, 1997년 이후의 JP를 함께 껴안음으로써 한국 현대사를 주도해 온 3김의 공과를 모두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3김의 공과를 써내려 간다면 과의 길이가 훨씬 길겠지만 무게를 달아보면 공쪽으로 기울 것임을 의심치 않은 것이다.
유시민은 이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이 좀 무섭다. 보수 쪽에서는 선호하고 진보 쪽에서는 안 좋아하는 정치인이 죽었는데, 대통령으로서 모든 국민들의 의견과 감정을 껴안으려고 하는 거다. 자기 지지층에 대해서는 말은 안 하지만 양해해 달라는 거다. 이게 좀 무섭지 않나. 보수 쪽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이 김종필에 대한 국민훈장 추서를 거부했어야 할 말이 많았을 텐데”라고 했는데 현 정치 싸움의 핵심을 읽은 것이다. PK와 충청은 ‘보수 동맹’에서 이탈하여 민주당을 새로운 대안으로 탐색하는 중이다.
3김과 ‘운동권’의 공통점은 정치를 ‘업’으로 본다는 것이다. 반면 자유한국당 의원을 포함해 대부분의 보수 정치인은 정치를 ‘직’으로 본다. 대통령이 되고 싶고, 장관이 되고 싶고, 국회의원이 되고 싶은 것일 뿐, 정치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정치를 업으로 본다는 것은 국민들에게 비전을 제시하고, 뜻을 함께하는 동지를 모으고, 정당을 조직하는 것을 즐겨야 한다는 뜻이다. 김대중, 김영삼이 거듭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결국 대통령이 된 것은 남다르게 강한 ‘권력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정치를 즐겼기 때문이다. ‘업’으로 정치하는 세력을 ‘직’을 보고 정치하는 세력이 절대 이길 수 없다.
2015년 문재인은 ‘이기는 정당’이라는 슬로건을 들고 민주당 당대표에 도전했다. 같은 해에 금태섭은 <이기는 야당을 갖고 싶다>는 책을 쓴다. (패배가 익숙한 정당에서) 승리에 대한 간절함을 이보다 더 직접적이고 절박하게 표현할 수가 있을까. 승리에 대한 간절함이 강력한 우승 후보이자 디펜딩 챔피언인 독일을 2 대 0으로 꺾는 기적을 만들었다.
김대중, 노무현에게 연속으로 정권을 내준 보수 정당은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는 팀 스피릿과 ‘이기는 DNA’가 있었다. 질 것 같지 않던 ‘무적함대’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지금 자유한국당은 패배에 대한 아픔도, 승리에 대한 간절함도 없다. 2020년 총선 전망이 절망스러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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