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2013년 박근혜 정권 출범 이후 시작된 한국 보수의 하락세는 2016년 이후 급속히 악화되었고 2017년 대선, 2018년 지방선거, 2020년 총선에 이르며 몰락의 역사를 썼다. 2016년 총선 출구조사 결과를 지켜보는 새누리당 관계자들, 2017년 대선에서 고배를 마신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 2018년 지방선거 출구조사 발표 후 자리를 뜨는 홍준표 한국당 대표, 지난 4월15일 총선 패배 후 사퇴를 밝힌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위 사진부터).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 글은 <정치 인사이드>의 에필로그다. 2018년 1월2일에 기고한 ‘한국의 주인이 바뀌고 있다’는 칼럼이 프롤로그였다면 (보수 진영이) ‘경악할’ 참패로 끝난 4·15 총선 후일담이 에필로그일 수밖에 없다. 민주당이 (범진보가 아닌 단독으로 꿈만 같았던) 180석을 얻었다. 미래통합당은 103석으로 개헌 저지선 확보 목표(?)를 가까스로 이뤘다. 사실상 궤멸 수준이다.
민주당이 ‘주류 교체 전쟁’에서 마침내 승리했다. 길게 보면 1990년 3당 합당의 ‘보수대연합’ 이후 지속되었던 보수 우위의 정치 지형이 종말을 맞았다. 지역·세대·이념·계층의 전 전선에서 보수는 우위를 잃었다. 보수는 상수에서 변수로, 주류에서 비주류로 전락했다. 바야흐로 민주당 우위의 시대가 열렸다.
2016년 총선부터 4번의 선거 참패…정치적 상수에서 변수로 전락
기득권·과거·낡음·분열 세력으로 낙인 찍힌 보수
‘더 큰 대한민국’ 만드는데 일조 했지만 ‘더 따뜻한 대한민국’엔 무심
시대 통찰 못하고, 자기 성찰은 안 하며, 나라 걱정 없이 ‘내’ 걱정만
전 영역 걸친 심각한 자폐 못 벗어나면 다시는 주류 될 수 없어
지난 2년, 바야흐로 ‘한국의 주인이 바뀌었다’
짧게 보면 2015년 2월 전당대회에서 문재인이 들고나온 절박한 슬로건 ‘이기는 정당’은 2016년 총선, 2017년 대선, 2018년 지방선거, 2020년 총선 승리의 그랜드슬램 달성으로 민주당이 실전적 ‘캠페인 정당’으로 성공적으로 이행했음을 증명했다. 민주당은 캠페인의 네 가지 전선인 혁신 대 기득권, 미래 대 과거, 새로움 대 낡음, 통합 대 분열에서 미래통합당을 (패배할 수밖에 없는) 기득권·과거·낡음·분열 세력으로 낙인찍는 데 성공했다. 민주당은 승패를 가르는 세 가지 요소인 전력·전략·정신력에서 상대를 압도했다.
‘한국의 주인이 바뀌고 있다’는 칼럼을 다시 읽어 보자. “…건국 이후든 해방 이후든 주류 교체는 (정권 교체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혁명적 사건이다. ‘이 나라는 내 나라’라는 인식이 강한 보수로서는 상상할 수도, 인정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영원한 제국 같았던 보수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 붕괴의 조짐을 눈치챈 사람들은 있었을 테지만 이렇게 빠른 속도로, 이렇게 무기력하게 몰락할지는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빈틈없이 강고해 보였던 지배 권력은 대개 그런 식으로 한순간에 와해적 최후를 맞았다. 히말라야가 무너지면 에베레스트의 아우라도 사라진다. 보수의 페르소나 박근혜가 몰락하자 보수의 아우라도 사라졌다…보수의 시대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것이다. 한때 세계 휴대전화 시장을 지배했던 노키아와 모토로라가 스마트폰 시대의 새로운 강자인 애플과 삼성으로부터 패권의 지위를 다시 찾아올 가능성과 비슷할 것이다. 그들은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혁신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순간에 몰락했다…1990년 3당 합당 이후 보수 정당 안에서는 자유주의 세력과 보수 세력이 ‘개혁’과 ‘보수’로 충돌하면서 만들어낸 다양성이 당을 강하게 만들었고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정체성이냐 외연확대냐, 집토끼냐 산토끼냐의 치열한 논쟁은 당의 건강성을 보여주는 바로미터다. 그러나 박근혜 정권을 거치면서 다른 목소리를 허용하지 않고 한목소리로 충성을 보이라고 몰아붙이더니 급기야 국정교과서라는 자폐적 광기의 정점으로 치닫고 말았다. 그때 보수는 끝났다…2010년 이후 모든 선거에서 20~40대 유권자층에서 보수는 한 번도 이겨 본 적이 없다. 2017년 대선 때는 50대마저 잃었다. 이미 자유한국당은 전의를 상실하고 한강 전선을 포기했다. 홍준표 대표가 대구의 당협위원장을 맡겠다고 선언한 순간 수도권 승부는 끝난 것이다…정치는 단순하다. 지지기반을 넓히면 살고 좁히면 죽는다. 지난 30년간 연합을 한 정치세력은 승리했고 분열한 세력은 패배했다. 예외가 없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보수가 정치적 상수에서 변수로 전락했다는 사실이다. 지난 30년간 유지돼온 민자당 대 반민자당, 한나라당 대 반한나라당, 새누리당 대 반새누리당의 보수 우위 시대가 막을 내리고 민주당 대 반민주당의 시대가 열렸다. 한국의 주류가 바뀌고 있다….”
세상에는 네 부류의 사람이 있다. 변화를 이끄는 사람, 변화를 좇는 사람, 변화에 둔감한 사람, 그리고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역사는 변화를 이끈 사람들의 기록이다. 보수도 한때 대한민국의 변화를 이끌었다. 역사는 그것을 기록하고 있지만 모든 사람이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보수는 이승만의 건국과 박정희의 산업화를 자손대대로 기억해야 할 레거시로 생각하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65세 이상 되는 세대에게는 그럴 수 있지만 그보다 젊은 세대에게는 더 자랑스러운 업적과 인물이 있다. ‘민주화’와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더 큰 업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코로나19’ 이후 대한민국은 선진국에 대한 열등감을 역사상 처음으로 거의 씻어냈다. 지금은 삼성전자·현대자동차·BTS·봉준호·손흥민·류현진의 시대다. 세계 최고라는 자부심 앞에 ‘한강의 기적’은 더 이상 (맨 앞자리를 차지할 만큼) 위대하지는 않다.
봉준호 감독은 미국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20년 동안 한국 영화는 영향력을 행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른 적이 없다. 이 사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고는 “좀 이상하긴 하지만 별것 아니다. 아카데미 시상식은 국제적인 영화제가 아니라 로컬 시상식이다”라고 답했다. 이미 칸을 평정한 거장다운 자신감이 묻어난 답변이었다.
어쩌면 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보다 상을 준 아카데미가 더 ‘영광’일 수도 있다. 조만간 스웨덴 한림원에서도 “한국에 노벨상을 주지 않는 우리가 이상한 건 아닐까”라는 대화가 오갈 수 있다. 지금은 그런 세상인데 보수는 변화에 둔감하고 변화를 두려워한다.
현실이 변하면 생각을 바꿔야 한다. 생각에 현실을 맞추려면 1970~80년대 박정희·전두환처럼 공포 정치를 하면 된다. 그게 가능한가. 아직도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이 떨어지면 떠났던 지지자들이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믿는다면 꿈 깨시라. 생각을 바꾸고, 사람을 바꾸고,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면 보수의 시대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보수가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보수를 어떻게 보느냐가 더 중요하다.
2012년 총선과 대선 승리 이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한국의 보수는 박근혜와 함께 1970~80년대로 돌아갔다. (과거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굳은 신념으로 뭉친 보수의 전사들은) ‘자유 우파’, ‘애국 보수’와 같은 시대착오적인 낡은 상품을 들고 나타나 시장을 놀라게 하고 있다.
‘낡아서 쓸모없게 된 제품’이라 시장에서 외면받고 있는데 옛 추억을 그리워하는 소비자만 보고 기업을 유지할 수는 없다. 데이비드 색스는 <아날로그의 반격>에서 LP를 찾는 젊은이들, 몰스킨 노트와 필름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난다고 했지만 솔직히 말해 얼마나 되겠는가? 스마트폰을 쓰지 않고 여전히 2G폰을 쓰는 사람들 정도나 될까. 최근 보수 진영에서 ‘젊은 보수’가 늘어난다며 몇몇 청년 그룹을 주목했지만 그런 식의 접근으로는 2010년 이후 모든 선거에서 20~40대의 철저한 외면을 받아 온 흐름을 뒤집을 수 없다.
한때 세계 휴대전화 시장을 지배했던 노키아와 모토로라가 아무리 인재를 영입하고, 판매 대리점을 늘리고, 마케팅을 강화한다고 해도 패권의 지위를 되찾아 올 수는 없다. 소비자가 ‘사고 싶은’ 스마트폰을 못 만들기 때문이다. 제품 경쟁력이 떨어진 게 와해적 몰락의 핵심 이유다.
한국의 보수는 아직도 냉전적 사고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한반도 평화체제 이행기에서 구경꾼으로 전락했다. 노태우 정부 때 ‘남북기본합의서’와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을 주도했지만 김일성 사후 25년간 근거 없는 ‘북한붕괴론’에 사로잡혀 한반도 평화 이슈의 주도권을 김대중·노무현·문재인에게 내주었다. 남북정상회담을 한 세 명의 대통령이 모두 민주당인 것은 보수의 전략적 실패를 상징한다.
‘통일’에서 ‘평화’로 한반도 이슈의 무게 중심이 이동하는 것도 읽지 못했다. 여전히 북한을 두려워하고 체제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하다. 자주국방에 대한 의지도 없다. 외교도, 안보도 남에게 의존하는 데 익숙하다 보니 당당함도 없다. 국제 정세의 변화를 읽는 통찰이 부족하니 담대한 전략도 없다.
‘더 큰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공이 큰 보수지만 ‘더 따뜻한 대한민국’에는 소홀했다. 무상급식을 비롯한 복지 확대를 지나치게 이념적 정쟁으로 만들었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관용과 포용도 부족했다. 한마디로 한국의 보수는 밖으로는 당당함이 부족했고 안으로는 따뜻함이 부족했다. 그런 사고와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국민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 다시는 주류가 되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지금 보수는 힘도 잃고, 길도 잃고, 꿈도 잃었다. 리더십도 없고, 전략도 없고, 비전도 없다. 반대자들에게는 조롱과 경멸의 대상이 되었고, 지지자들에게는 자부심을 주지 못한다. 이번 총선에서도 마지못해 ‘찍어준’ 유권자가 꽤 될 것이다.
경영전략가인 짐 콜린스는 <위대한 기업은 다 어디로 갔을까>라는 책에서 강하고 능력 있는 기업의 몰락을 5단계로 설명했다. 1단계는 성공으로부터 자만심이 생겨나는 단계, 2단계는 원칙 없이 더 많은 욕심을 내는 단계, 3단계는 위험과 위기 가능성을 부정하는 단계, 4단계는 (공포와 절망 속에) 구원을 찾아 헤매는 단계, 5단계는 유명무실해지거나 생명이 끝나는 단계다.
한국의 보수는 4단계에서 5단계로 넘어가고 있다. 시대의 흐름을 읽는 ‘통찰’도 없고, 자신을 향한 ‘성찰’도 없다. 나라 걱정도 없고, 당 걱정도 없다. 오로지 자기 걱정뿐이다.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위기의식이 없다. 위기를 극복하려면 위기에 동의해야 한다. 그래야 원인도 찾고 해결책도 찾을 수 있다. 위기에 동의하지 않으면 한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 2016년 총선 이후 네 번의 참패를 당한 것은 패배 이후에도 위기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다를까? 글쎄….
1990년 3당 합당 이후 한국 보수는 ‘남북기본합의서’를 통해 한반도 이슈를 주도했고, ‘개혁적 보수’ 정당인 ‘신한국당’을 만들었고, ‘공동체 자유주의’라는 이념과 정책을 고민하기도 했다. 적어도 2012년까지는 경쟁력이 있었다. 2013년 박근혜 정권 출범 이후 서서히 망가지기 시작하더니 2016년 이후 급속히 악화되었다. 솔직히 말해 지금은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망가졌다.
2020년 총선 결과는 한국 보수가 지역·세대·이념·계층의 모든 영역에서 심각한 ‘정치적 자폐증’을 앓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나는 지난 2년간 이 지면을 통해 한국의 보수가 다른 사람과 상호관계가 형성되지 않고, 정서적인 유대감도 없이 ‘자신의 세계에 갇혀 지내는 상태’인 정치적 자폐를 벗어나지 못하면 ‘보수의 몰락’과 ‘주류 교체’가 불가피하다고 경고했으나 갈수록 증상이 심해지는 것을 보며 절망했다.
‘한국의 주인이 바뀌고 있다’는 프롤로그는 ‘한국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에필로그로 끝을 맺는다. 논리도 없고 깊이도 부족한 글에 2년간 귀한 지면을 내준 경향신문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시즌1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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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