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성민의 Deep Read - 호남 ‘전략적 선택’ 향배
광주·전남, DJ시대 이후 盧-文 거치며 ‘될 사람 밀어주기’…‘영남 대권 + 호남 지지’의 전략동맹 이끌어
호남의 정권 창출 영향력 줄며 與 권력 지도에 큰 변화… 이재명이 대선 후보 돼도 호남에 ‘빚’ 없어
지난 25일 더불어민주당의 광주·전남 순회경선 결과는 이낙연 47.12%, 이재명 46.95%로 ‘이낙연 승’이다. 불과 0.17%포인트, 122표 차지만 승부의 세계에서 차이가 아무리 작아도 결과는 결과다. 이낙연이 광주·전남의 승자다.
이재명은 바로 다음 날인 26일 발표된 전북 경선에서 과반 득표로 대세론을 살려냈다. 현재까지 이재명은 광주·전남을 뺀 모든 지역에서 과반 득표를 했다. 서울·경기 등 수도권을 포함한 남은 곳도 이재명에게 유리한 지역이라는 전망이 많다. 그가 최종 승리한다면 ‘광주·전남에서 지고 민주당 후보가 되는’ 첫 사례를 기록하게 된다. 이낙연 입장에선 ‘광주·전남에서 이기고 민주당 후보가 되지 못하는’ 첫 기록이다. 이는 곧 광주·전남이 대선 국면에서 ‘될 사람 밀어준다’는 이른바 ‘전략적 선택’을 포기했다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DJ 시대의 ‘호남 대망론’
1987년 민주화 이후 민주당은 호남 출신의 김대중(DJ)을 빼면 노무현과 문재인 모두 ‘호남이 미는 영남 후보’로 집권해 왔다. 노무현·문재인이 PK(부산) 출신, 이재명은 보수의 본거지인 TK(경북 안동) 출신이다. 이낙연만 아니었다면 광주·전남은 압도적으로 높은 비율로 이재명에 대한 전략적 지지를 보냈을 가능성이 컸다. 호남이 이낙연을 통해 DJ 집권 이후 한때 폐기됐던 ‘호남 대망론’이 살아나기를 기대했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전략적 선택’을 회피하게 만든 셈이다.
오랜 기간 광주·전남은 진보의 심장이었고 민주의 고향이었다. 그만큼 선명한 가치가 있었고 상징적 인물도 있었다. 1987년 이후 1997년 대선까지 DJ 중심의 호남 구심력은 강력했다. 이른바 ‘비판적 지지’는 그 시대 민주동맹의 역학 관계를 상징한다. 민주당과 진보 진영은 DJ의 카리스마와 호남의 압도적인 영향력 때문에 사실상 속으로는 DJ를 ‘맹목적 지지’하면서도 겉으로는 ‘비판적 지지’로 포장했다.
그런 DJ조차 김종필(JP)과의 선거·통치동맹, 그리고 이인제의 출마에 따른 보수 분열이 아니었다면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를 초래한 김영삼 정권의 임기 말 실정 등 온갖 호재에도 불구하고 DJ는 1997 대선에서 보수진영 이회창에게 1.5%포인트 차의 힘든 승리를 거뒀다.
◇‘영남 대권+호남 지지’의 전략
DJ 시대가 저물며 ‘호남 대망론’도 자연스럽게 소멸했다. 2002년 대선부터는 ‘호남 대망론’을 대체하는 ‘전략동맹’이 맺어졌다. 전략동맹이란 ‘호남이 미는 영남 후보’ 구상이다. ‘영남 대권 + 호남 지지’가 새로운 전략동맹 모델로 채택된 것이다. 이후 호남 출신 정치인들은 대개 영남 대권 후보의 지원세력으로 기능했다. 특히 광주·전남은 2002∼2020년 시기 대선 후보는커녕 당 대표 하나 내놓지 못했다. 전북은 그나마 정동영·정세균 등 대선 후보나 당 대표를 배출하곤 했다.
지난 2015년 문재인과 박지원이 당 대표를 놓고 맞붙은 전당대회에서 “호남은 당 대표도 못 하느냐”는 박지원의 절규는 그 자체가 광주·전남의 절규였다. 박지원이 전대 패배를 맞본 후 반문(반문재인) 정서가 호남, 특히 광주·전남에서 급속히 확산됐고, 민주당은 분열됐다. 2016년 20대 총선에서 박지원·천정배 등 호남 세력은 안철수·김한길 등 신당 추진파와 함께 국민의당을 창당했고, 호남은 여기에 ‘전략적 투표’를 했다. 국민의당은 호남 의석을 싹쓸이하다시피 했고, 정당 득표율 2위로 원내 3당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문재인은 호남 없이는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호남과 전략동맹을 맺었다. 그런 점에서 문재인 정부는 사실상 호남 정부다. 과거 2006년 노무현 정권 당시 문재인이 지방선거를 앞두고 “노무현 정부는 부산 정권”이라고 했던 걸 떠올린다면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호남의 ‘전략적 선택’ 회피
문 정권에서 이낙연이 총리가 되고 당 대표에 오른 것은 ‘영남 대권 + 호남 지지’라는 전략동맹의 산물이다. 호남은 줄곧 굳건한 지지로 정권에 화답했다. 조국 사태를 비롯한 수세 국면에서 문 대통령과 민주당을 지켰다. 호남 인구가 전국 10% 정도이므로 전국 평균보다 30%쯤 더 높은 호남 지지율은 전체적으로 3%의 지지율 상승효과를 준다. 수도권에 진출한 디아스포라 출향민을 포함하면 적어도 5% 이상의 지지율을 호남이 떠받쳐주는 것으로 분석된다.
DJ 시대가 지난 후 호남은 정치를 도덕이나 가치가 아니라 권력의 프리즘으로 보는 데 더 집착했다. 그 과정에서 한때 소멸한 듯했던 ‘호남 대망론’이 살아났다. 조국, 김경수 등 친문(친문재인) 주자가 하나둘 스러지면서 이낙연의 가치가 올라갔다. 2020년 총선 때 서울 종로에서 야당 대표 황교안을 꺾고 민주당 압승을 이끌며 지지율이 폭등했다. ‘호남 대망론’이 대세론이 되는 듯했다.
하지만 이낙연의 당 대표 출마는 전략적 실수였다. ‘당 대표(2015년)→대통령(2017년)’의 문재인 모델을 따르려 했겠지만, 잘못된 계산법이다. 야당 대표는 대통령과의 투쟁을 통해 정치력을 키우지만 여당 대표는 그리 간단치 않다. 특히 차기 대권을 바라보는 여당 대표는 대통령과 불가근불가원의 숙명적인 긴장 관계일 수밖에 없다.
여당 대표를 지낸 이회창·정동영·김무성이 모두 현직 대통령과의 관계 설정에 실패해 대통령이 되지 못했다. 이낙연은 문 대통령과의 ‘차별화’가 아닌 ‘계승자’로서의 정체성을 굳히고 차기 대권의 라이벌인 이재명과의 차별화를 택했다. 대권을 꿈꾸는 여당 주자가 현직 대통령과 차별화를 시도하고, 대통령이 이를 어느 정도 용인해준 관계에서 대권을 바라볼 수 있었다는 역사적 경험들을 돌이켜 보면 위험한 도박이다.
◇저무는 전략동맹 시대
아직 여당 경선이 끝나지 않았지만 현재의 이재명 우위가 뒤집히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이재명은 친문도 아니고 광주·전남의 ‘전략적 선택’도 받지 못했다. 그가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된다면 ‘영·호남 전략동맹’에서 자유로울 뿐 아니라 민주당 역사 최초로 호남에 빚을 지지 않은 후보가 되는 것이다.
DJ-노무현-문재인 시대를 거쳐 내년 대선을 앞두기까지 호남의 정권 창출 영향력은 약화하는 추세다. 호남, 특히 광주·전남이 다시 민주당 내 주류의 지위를 획득하고 한국 정치의 중심이 되려면 새로운 가치·노선·인물이 필요하다. 지금의 혼란이 새로운 시대의 전야가 될지, 시대의 마지막 밤이 될지는 전적으로 경선 이후 호남의 숙고에 달렸다.
정치컨설팅 민 대표
■ 세줄 요약
‘전략적 선택’의 포기 : 이재명이 여당 대선 후보가 된다면 광주·전남의 전략적 선택을 받지 않고 민주당 후보가 되는 첫 사례. 이는 곧 호남이 대선 국면에서 될 사람 밀어주는 ‘전략적 선택’을 포기했다는 것을 말해줌.
호남대망론과 전략동맹 : 1987년 이후 DJ는 ‘호남대망론’에 힘입어, 노무현·문재인은 ‘영·호남 전략동맹’으로 집권. DJ 시대와 함께 ‘호남대망론’도 소멸했고, 2002년 대선부터는 ‘전략동맹’이 이를 대체.
호남 영향력의 약화 : DJ-노무현-문재인 시대를 거치면서 호남의 권력 창출 영향력은 약화함. 이재명이 대선 후보가 된다면 ‘영·호남 전략동맹’에서 자유로울 뿐 아니라 호남에 빚을 지지 않은 민주당의 첫 후보가 되는 것.
■ 용어 설명
‘전략적 선택’은 ‘될 사람 밀어주는’ 호남의 투표 성향. 주자들의 ‘호남 친화성’과 ‘본선 경쟁력’이 주요 요소로 작용. 이재명이 광주·전남 경선서 진 것은 호남의 ‘전략적 선택’ 회피라는 분석 나옴.
‘전략동맹’이란 ‘영남 대권 + 호남 지지’ 형태의 선거·통치동맹을 말함. 광주·전남이 경선에서 TK 출신 이재명 대신 호남 출신 ‘이낙연 승’을 만들어주면서 ‘전략동맹’ 시대도 가고 있다는 관측 나옴.
원문보기 :
https://www.munhwa.com/news/view.html?no=2021093001030642000001